간단히 말해서 최 모 작가의 죽음은 우리 사회의 암울한 그림자를 보여주는 것같다.
하지만 다시 다져보면 그의 죽음은 우리 사회의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문제에 잇닿아 있다.
남의 집 문에 밥좀 달라고 하소연할 수 있는 용기라면 그의 죽음은 왜 그렇게 인구에 회자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서른 두 살.
살아야 한다면 뭐든 할 수 있는 나이다.
방에서 글만 써야하는 입장이라면 그의 입장도 충분한 변명이 되겠지만 그의 죽음은 그러한 변명조차도
허락하지 않는 분위기로 몰아져가고 있다.
단순히 기사에 나온 것만 가지고는 그 속사정을 다 알 수가 없으니 내 생각도 지레짐작일 수 있겠다.
하지만 연일 신문들이 내 거는 카피는 사람들에게 진실보다는 감정에 더욱 집착하게 만든다.
G20 의장국에서 굶어 죽은 젊은이..
이런 카피는 우리의 자화상을 어둡게 만드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대해서 모두가 다 진정으로 애도하고만 있는 것은 아닐것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라면 식당에서 일도 마다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간혹 나오는 개그맨들의 눈물 어린 고생기를 보면 인생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일명 개처럼 살며
성공을 꿈꾸며 살아온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서른 둘의 앞 날이 창창한 전도 유망주가 지병과 허기를 못이겨 객사나 마찬가지로 죽어갔다는 것을 두고
보편적 복지에 잇대어 기사를 써 내는 기자들의 왜곡된 포퓰리즘은 그간에 그나마 보편적 복지에
대한 생각을 어느 정도 기울여도 보았던 나에게 치명적인 반감을 안겨준다.
그의 죽음에는 알려지지 않은 더 많은 복잡한 원인들이 있을 것이다.
지병으로 일을 할 수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고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아서
그랬다고도 볼 수 있다. 가족이 없었던가? 기사에서 그런 내용은 본 적이 없는 것같다.
홀홀 단신이었던가? 그런 상황에서 연락할 친구도 없었던가. 그 유명하고 기대주였던 작가가 말이다.
그가 죽기까지 고생하며 숨이 문턱에 넘어갈 때, 지금 그렇게도 기사를 줄줄이 사탕처럼 꿰어내는
기자분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그 모든 책임은 과연 태통령에게 있는가.
그런 보편적 복지에 관심이라도 있었던가. 우리 대한민국 기자분들이.
죽고 나니 꽹과리 울리듯 깽깽거리며 키보드 신공으로 자극적인 카피들을 써대는 기자들의 안목에
과연 젊디 젊은 한 젊은 작가의 죽음이 이제와서 왜 그렇게 이슈가 되어야 하는가.
그 보다 더한 젊은이들이 어디서 어떻게 죽어가도 신문 한 켠 차지하지 못하는
일명, '평범한 죽음'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이용할 수 있으면 이용가치가 있어서 기사를 쓴다고 치자.
본질에 집중할 수 없을만큼 이 나라의 부정과 부패가 심하다고도 치자.
그러나 북치는 소년들이여, 그대들이 서 있는 그 자리는 과연 홀로 외로운 정의의 자리인가 말이다.
그 자리는 황금의 자리가 아니고 자갈밭이란 말인가.
책상 머리에 앉아서 지어내는 소설 같은 기사들로 밥벌이를 하는 것이 정말 부끄럽지 않은가 말이다.
지나간 영상을 편집하여 내보내며 죽음에 애도한들, 죽어간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
그저 시국에 맞추어, 사상에 기대어 필요한 일인만큼 가져다 쓸 '기삿거리'정도의 사건을 가지고
이제는 더 갈데도 없을만큼 치달은 보편적 복지에까지 닿아있다는 사실이 두렵기까지 하다.
도무지 어디까지 가야 이 비판의 심정이 좀 수그러든다는 말인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남의 집에 밥 달라고 글 써 붙이는 재주가 있는 그이가,
그렇게 죽어간다는 것을 '선택'했음이 믿어지지 않는다.
살고자 하는 욕망 보다는 자신을 일으켜세워주었던 그 어떤 내면의 왕관이 있었다면 모를까 말이다.
파출소라도 가야 한다.
무료 급식소라도 가야 하는 것이다.
그 만큼 살고자 하는 의지에 매어달리지 못하는 그이의 연약함이 그의 죽음보다 더 불쌍하다.
사람의 죽음만을 놓고 그 원인을 따지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 죽음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부각시키기 위해 그 죽음을 이용하는 것은 또 얼마나 잔혹한가.
차라리 그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그 만의 아픔이 있었음을 알아내어
독자들에게 알려주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겨우 영화제작의 병폐나 헤집고 드러낸다고 해서 나아질 것이 무엇인가.
시나리오 작가로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고 실패를 거듭하는 사람 또한 한 두 사람이 아닐 것이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려면 그런 세상에 어떤 것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기대할 것이 없는 세상에 나 홀로 살아가겠다는 천형같은 짐을 스스로 졌다면
그만큼 모질게 살아내어 세상에 복수했어야 마땅한 일이다.
그의 죽음이 달리 안타까운게 아니다.
복지 혜택의 사각 지대에 파묻혀 힙겹게 살다 죽어간, 현대 사회 문제 중심에 그가 서 있다고
그렇게 거창하게 갖다붙이기만 하는게 대수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보편적 복지와 아무 관련이 없다. G20 의장국에는 더욱 관련이 없다.
그의 그런 사정을 몰라주고 무사안일에 빠져 지낸 지역 사회복지사에게 불똥이 튀지는 않을까
걱정해야 하는 것일까?
정말 다른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그의 죽음은, 그가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시나리오 작가라는 그 험난한 길에서부터 출발점이 있었던 것이고 그것을 그가 선택한만큼
혹독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한 안타까운 한 연약한 여성의 죽음으로서
그 결말에 안타까움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경쟁사회의 불합리,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그의 죽음을 통해서 새삼
발견할 수는 있는 일이다. 그것을 절대로 정치적인 이슈에 갖다 붙이지 말자.
그렇게 거대하게 상징화할만큼 그의 죽음은 의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가 가진 질병과 그의 복합적인 상황들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면
그것은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사회의 문제고 어느 한 점을 찍어서
지적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의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제 와서 능력있는 작가였다고 하면 무엇하는가.
세상은 그런 천재적인(아니, 아니었을수도 있지만) 작가를 알아줄만큼 성숙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의 재능이라는 것이 순간적인 반짝임이었던 것일까?
그 보다 덜 재능있는 시나리오 작가들이 살아남는데에는 별다른 계략이라도 있었다는 말인가.
생각하면 할 수록 그의 죽음을 가지고 이리저리 간판을 돌려 내거는 신문이나 인터넷 찌라시 언론들의
행태가 역겹지 않을 수 없다.
정작 이 사회를 더럽히는 요소는 바로 그런 언론의 각색된 행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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