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설교에 예화가 빠진다면 조는 성도들이 더 많을 것이다.
보통은 목사의 설교가 너무 지루하다 싶다가도 재미있는 예화가 하나쯤 나오면
그제서야 솔깃하게 귀를 기울이고 정신을 차린다.
목사는 그 틈을 이용해 필요한 설교를 주입한다.
그런 방법쯤은 학부 시절 설교학 강의 시간에 배우기도 하거니와 다년간의 설교 경험상
자연스레 얻어지는 하나의 방법론이다.
그런데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메세지보다 예화에 집중하는 성도를 보는 목사의 심정은
이래 저래 복잡해진다.
다름 아니라,
본래대로라면(실은 이것도 정답은 없거니와) 메세지 자체에 전적으로 집중해야 하지만
메세지만 가지고는 성도를 감동시킬 수 없다는, 아니 그 앞서 성도의 굳은 마음을 열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데서 나온 고육지책이기는 하나 예화를 너무 자주 사용하거나 또는
인위적으로 고정 출연시켜야 한다는 부담때문이다.
예화란 무엇인가.
예를 든 하나의 사례가 아닌가. 수 많은 인간의 삶에서 나오는 다양한 경우의 특별한
상황을 잘 기록해 두었다가 다른 이에게 전해줌으로써 당시에 받았던 영감이나 감동을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이 바로 예화라고 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과거의 예화를 현재의 사건으로 실현시키고자 하는데서 발생한다.
예화 속의 인물과 상황이 결코 현재와 같을 수는 없다.
그런데도 예화를 듣는 사람들은 마치 그 시대와 상황 속에 자신이 있는것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오인하기까지 한다.
예화 속의 인물이나 상황이 나의 경우와 비슷하면 할 수록 그 몰입도는 더 커진다.
그래서 일부 목사들은 예화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를들어,
어느 고3 수험생이 교회에 충성하고 열심히 새벽기도를 했더니 서울대에 갔더라..하는 예화부터
시작해서 어느 수험생은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절망하고 있던 차에 꼭 그 대학에 가야하니
기적을 내려달라고 100일 특별기도를 했더니 시험 당일에 답을 척척 맞혀서 붙었다더라는
정말 말도 안되는 예화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예화들이 전국의 수많은 교회와 목사들의 입을
통해서 전파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정말 고3 수험생이 교회에 충성하고 열심히 새벽기도를 해서 서울대에 갔을까? 그건 아니지 않은가.
공부 안하고 교회만 열심히 다닌다고 대학에 붙는다며 누가 공부하겠는가.
서울대 입학생들이 모두 교회 열심히 다니는 것도 아닌데 과연 이 일의 진실은 무엇일까?
그 학생의 공부 습관이나 가정 분위기, 그 부모의 교육 방법, 학교 선생님들과의 관계, 평소 내신 관리,
그리고 정서적 특징이나 건강, 그리고 아이큐까지..다양한 평가 기준이 서울대에 갈 수 있는 조건에
일치했기 때문에 서울대에 간 것이다.
그럼 교회 봉사와 새벽기도는 아무 효력이 없었다는 말일까?
물론 그건 아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으로 대학입학 자격이 불가분의 함수로 작용한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아이가 교회에서 봉사를 함으로써 얻는 신앙적 확신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그 아이의 인성과 감성에 전적으로 작용하고 목표를 더욱 뚜렷이 볼 수 있게
하거나 어떤 결정을 내릴 순간에 판단력에 도움을 주는 강인함, 그리고 슬럼프에 빠진 자신을 다시금
일깨우는데에 분명히 작용한다. 그것을 신앙적인 어떤 특수한 현상으로 굳이 이해하려 하는 것은
사실상 억지에 가깝다.
심지 않은데에서 거두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땅에 묻어둔 달란트로 책망받은 이에 관한 우화가 성경에도 분명히 있다.
자신이 해야할 일을 다하지 않고 기적을 바라는 이기적인 행태는 한국 교회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요즘에는 그럴리가 별로 없겠지만
한국 샤머니즘과 기독교가 묘하게 얽혀서 기복신앙으로 이어지는 바람에 한국 기독교의 고질적인
병폐가 여전히 남아있는게 사실이다. 꿈에 뭘 봤다는 사람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람이 신이라고 믿는 어리석은 지경까지 한국 교회에서는 참 말못할 부끄러운 행태들이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이제는 그런 것을 끊어내야 한다. 그렇다고 서구의 기독교가 모두 옳다거나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나친 개인주의, 그리고 국수주의와 기독교가 늘 얽히고 설켜있는 것이 서구 사회이다.
또한 그런 종교적 우선권을 정치에 활용할 줄 아는 것도 역시 서구의 행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면에서는 아직 한국 교회는 정치와 그리 친밀하지 않은 것같아 다행이다.
바로 이러한 샤머니즘적 기독교의 잔재가 뿌리깊게 남아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잘못된
예화를 사용하는 설교때문이다. 뭐라고 했다더라..는 식의 예화를 쓰고 나서야 겨우 성경에도 그와 같이..
라고 갖다 붙이는 목사들의 설교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리고 예화란 것이 본래 주로 구전되다가 문서화된 것이다보니 내용상의 오류가 충분이 있을 수 있고
어느 한 편으로 유리하게 작용되어 정리되는것도 사실이다.
그런 불완전한 예화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설교에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더욱 웃기는 일은 그런
예화를 예수가 이미 수천년 전에 사용했다고 믿는다는 사실이다. 과연 그럴까?
예수가 사용한 예화가 사람들에게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결과를 얻을 것이라는 허황된 믿음을 심어주는
그런 예화란 말인가.
교통사고난 환자가 진찰을 하다가 뱃속의 암이 발견되었다. 그는 너무 절망한 나머지 의사의 권고를 저버리고
스스로 40일 금식기도를 하러 기도원에 들어갔고 놀랍게도 40일 후에 암이 완전히 낳아서 나타났으며
결국 신학을 해서 목사가 되었다는 예화를 들으면 암환자들은 거기에 희망을 걸고 자신도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히게 되어 의사를 불신하게 된다.
평소에 믿었던 의사가 이제는 돈만 밝히는 파렴치한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는 약도 먹지 않고 어디 좋은 기도원, 그 목사가 낳았다는 기도원을 소개받아 거기에 갈 생각만 하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예화의 좋은 결론인가 말이다.
목사가 예화를 쓸 때에 이렇게 되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받아들이는 사람 중에는 이런 이상한
결과를 낳는 사람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100마리의 양 가운데 단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소중하게 여기는
예수의 지침을 어기게 되는 이런 경우에 어떤 해답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목사의 한 마디에 자기의 전 생애를 거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니 예화를 사용하기에 앞서 바른 예화를 사용하고 분명히 할 것은 예화는 하나의 예일 뿐,
그 현재성에는 의문이 있다는 사실을 잘 인지시켜야할 책임이 목사들에게 있는 것이다.
예수의 예화에는 기복 신앙을 조장하는 예화를 찾아볼 수 없다.
오늘날의 목사들은 예화를 들어 말할 것이 아니라 예수처럼 직접 눈먼 자의 눈에 진흙을 발라 낳게 하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책에서 빼낸 몇 개의 예화로 성도들을 감동시킬 생각이라면 차라리 감동적인
책 한권을 읽으며 토론하는 독서토론회를 여는게 낫다.
자신 스스로가 예화의 주체가 되는 목사가 아쉬운 오늘날이다.
'배움-Life i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식의 오류1 (0) | 2011.01.31 |
---|---|
행동장애 ADHD증후군을 인정못하는 엄마들 (0) | 2011.01.15 |
스리랑카에서 온 코끼리 (0) | 2010.10.26 |
맥시안 l900s를 고치다 (0) | 2010.09.01 |
숭례문 (0) | 2008.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