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눔-I think..

성도가 싫어하는 설교, 좋아하는 설교

오션지 2011. 5. 20. 15:25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십수년의 학업 기간을 거쳐야 한다.

어떤 이들은 목사가 편히 먹고 배부르게 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목사라고 하면

기름진 얼굴에 벗어넘긴 머리 스타일, 그리고 번지르르한 옷과 승용차 정도로

치부할지는 몰라도 기실 그렇게 사는 목사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지 않고 힘들게 어두운데서 빛도 없고 고생하며 양들을 지키는 수 많은 목사들은

미처 양지로 나올 틈조차 없으니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그에 비해서 일반적으로 번지르르하다는 목사들은 성공적인? 목회 덕분에

외부에 노출이 많이 되니 보는 사람들이 그 겉모습만 보고도 그렇게들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 그 일명 번지르르한 목사들이 성공적인 목회를 하는 이유는 뭘까?

몇가지 일반인들이 짚어내는 '설'들이 있다.

우선 설교가 뛰어나서 그렇다고 한다.

그 다음이 행정력이 뛰어나서 그렇다고 하고

그 다음이 인간관리를 잘해서 그렇다고 한다.

그 다음도 있고 그 다음도 있지만 사실 들여다보면 결코 사실이 아닌 내용들이

많기에 그런 것들은 접어두기로 한다.

 

여기서는 먼저 목사의 설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성공적인 목회에 있어서 설교는 대단히 중요하다. 아니, 신학생들이 배우는

과정에서 접하는 많은 교훈들 중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다.

어느 신학대학이고, 혹은 대학원 과정이고간에 그 교육과정 전체에서

설교를 빼고 목사가 목회를 할 수 있다고는 절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사이비신학대학이거나 신학대학자체가 아니다.

목회의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는 중요 요소가 바로 설교다.

그래서 설교에 많은 비중을 두고 가르치곤 하는데 놀랍게도 그렇게 중점을 두고

강조하는 설교학 자체가 신학생들이 크게 비중의식을 못한다는데에 심각성이 있다.

 

설교란 무엇일까?

설교학 책을 보면 다양한 이론이 나와 있지만 일반 성도들은 목사가 그런 이론을

배웠는가도 관심없을 뿐 아니라 봐도 잘 모른다.

그저 일반 성도는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일 뿐이다. 그 진정성과 전체적인 중대함이란 것은

설교자의 몫일 뿐, 듣는 이인 일반 성도는 그것을 제대로 인식할 이유도 없는 셈이다.

그러고보면 동상이몽이 바로 이런 것이다.

목사는 자신의 영적 깨달음이나 신적 계시들을 성도에게 전해주고자 노력하는데 비해

성도들은 그런 진정성이 무게에 관심은 없고 오직 들리는 설교에만 관심있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가 설교할 때는 전하는 설교여야 함과 동시에 들리는 설교에도 관점을 두어야 한다.

전하는 설교에만 관점을 두게 되면 쉽게 성도와의 영적 커뮤니케이션에서 문제를 야기시킬 수가 있다.

그러나 들리는 설교에 관심을 갖는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진다.

 

물론, 들리는 설교에만 관심을 가져도 문제는 커진다.

하루 종일 힘든 일에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성도에게 죄에 관한 설교는 그리 설득적이지 않다.

그런가하면 아이가 서울대에 입학한 기쁜 소식을 안고 예배에 앉아있는 성도에게

갈보리 십자가의 예수가 흘린 피를 상상하는 것은 왠지 언밸런스같이 여겨질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성도의 심리 상태나 상황적 연계를 목사가 설교로서 일일이 어루만질 수는 없다.

그래서 그러한 성도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예배를 드리는 동안 목사의 설교와는 다른

다양한 상황적 변수들이 작동하면서 성도와 목사간의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결국, 1년 52주의 예배를 드리는 성도에게 목사의 설교는 늘 좋은 설교가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 그렇게 진정성에서 손실을 본 예배를 드린 그 성도의 입장은 그래도 거룩하고 성숙한 예배를

드렸다고 할 수 있을까?

서울대 입학한 아들에 대한 생각으로 기쁨이 가득한 성도가 갈보리 십자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감정동화는 쉽게 일어나지 않을게 틀림없다. 그 모습은 마치 그에게는 죄가 없는

떳떳함으로까지 보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 내면을 누가 들여다본단 말인가.

 

그래서 설교자의 설교는 들리는 설교가 아니라 선포하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고

애써 마무리를 하는게 사실이다. 그 선포가 매번 다양한 인간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간음한 여인이 사람들에게 잡혀와 예수에게까지 왔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그런 여인을 어떻게 평가할른지 상당한 호기심을 가지고 예수를 테스트하려고 한다.

이 절대절명의 위기 상황은 매우 극적이거니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비슷한 호기심을

가지게 할만큼 독특한 사건이다. 그런데 한번 눈길을 잠깐 돌려보자.

그런 예수에게 그 당시 그 지방 사람들이 모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닐 것이다.

비슷한 경험이 있었던 사람들이거나 그녀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 그리고 바리새인인 당사자들, 그리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 그들을 따르는 인파들..당시 인구로 봐서 그렇게 구름떼 같이 몰리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그럼 모두가 다 예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도 있었고

구경 삼아 별 감흥없이 지켜보던 사람도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지나치게 진정성에만 호소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반드시 그 상황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와야 하는 강박에 시달린다.

그걸 그냥 보고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런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지나친 사람이

그날 예수의 훌륭한 답변을 직접 듣지 못했다고 해서 반드시 구원받지 못했다고

단정지을 수도 없다. 나중에라도 자기가 지나가면서 봤던 그 장면이 바로 죄인에 대한

예수의 시각이었다는 점을 전해듣고 회심했을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을 일일이 컨트롤하며 복음을 전하는 예수는 성경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그의 행위나 말이나 다른 다양한 표현들 자체가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채널로 선포의 행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의 말이나 행동, 그리고 이적들에 대해 지나치게 집중하고

의미 부여를 하려고 하는 이상한 강박에 시달린다.

그러나 그의 행동이나 말, 그리고 표현들이 반드시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들을 수 있고 접할 수 있는 그 장소, 그 시간, 그 상황에서이 사건이었다고 생각해보자.

바로 그 순간 예수의 선포는 상당부분 객관화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 깊은 강박에서 헤어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 강박에서 헤어나오는 순간, 내 앞에서 나를 묶어놓던 예수의 기적과 말과 행동들이 주는

수많은 '의미'들로부터 나는 해방되는 것이다. 진리가 자유케 한다는 말의 새로운 해석일수도 있다.

오늘날 성도들이 예수의 말이나 행동, 표현들이 일반적으로 선포되는 객관적 사건이었다는 점을

인식하기에 앞서 그것이 반드시 내게 향한, 나를 향한, 나를 위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나친 강박에 시달리게 되고 그 강박을 심어주는 역할을 목사가 하고 있는 셈이 되고 말았다.

 

목사는 그러므로, 반드시 선포하는 설교로 성도들을 묶어두지 않는게 좋다.

오히려 그냥 들리는 설교를 함으로써 사람들이 다양한 상황에서 받아들일 부분만 받아들이는

자유를 선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사 스스로가 먼저 객관적 사실을

지나치게 의미화해서 개인에게 일일이 적용시키려는 강박에서 헤어나와야 한다.

그것은 예수를 영원히 십자가에서 못박아 놓고 내려오지 못하게 막는 행위와 같다.

그런 강박이 결국 십자가에 자기 스스로를 못박아 버리게 하는 변종적 신앙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 십자가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며 죄수 하나가 또 죽었군. 하고 애틋한 동정심을 느끼며

지나갔을 다른 수 많은 사람들처럼 나 역시도 그것을 그냥 하나의 객관적 사실로만

인식할 수도 있다.

그것이 의미화되기 위해서는 사실이 아닌 의미로서의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야 하는데

그 역할이 바로 목사가 하는 설교여야 한다. 그래서 들리는 설교가 필요하게 된다.

선포되는 설교는 객관적 설교라면 들리는 설교라는 것이 바로 개인화과정인 것이다.

잘하는 설교는 선포에만 머무르는 설교다.

그러나 진정한 설교란 바로 선포와 개인화까지 아우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