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흉내내서 죽었다느니, 타살이라느니, 말들이 많은 사건이
일어나서 민심의 동요가 있는 모양이다.
십자가는 사람들의 목에 매어달려 대롱거리며 빛을 발하기도 하고
죄지은 자가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는 현장에서 묵묵히 그를 바라보는
엄숙함을 지니고도 있는 다양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상징적인 그 물건에 사람들이 굳이 의미를 두는 이유는
그것이 생긴 모양이 호소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십자가와 얽힌
역사적 사실이 주는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십자가 자체는 중동의 사형수를 처형하는 형틀이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목에나 귀에 매어달고 다니는 것이 아름다워보일리는
없다. 그것을 액서세리로 활용하는 이유는 복합적이겠지만
목에나 귀에 걸었을때 그 모양이 주는 단정함, 그리고 십자가라는 그 명칭이
주는 어렴풋한 뉘앙스가 좋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십자가는 고통과 구원의 소망을 동시에 담고 있는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진 상징적 물건이다.
그 물건 위에서 한 인간이 신으로서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자신의 생명을 희생함으로써 다른 인간의 죄를 씻어주는 제사를 드린 곳이다.
인간은 자신의 죄를 씻는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신에게 바쳐왔다.
어린 소녀를 바치기도 했고 아기를 바치기도 했으며 여성을 산 채로 바치기도 했다.
결코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희생하는 법이 없었던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죄인들이었다.
좀 더 문명화되면서 인간이 택한 제물은 동물이었고 인간으로서 동물을 희생시키거나 또는 다른 인간을
형틀에 매달아 죽이면서 자신이 저지른 남모르는 죄를 전가시키는 내밀한 쾌감을
즐기기까지 했다.
그런 십자가라는 형틀을 이용한 인간의 이기적인 죄씻음은 결코 자기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항상 빠져있어야 했다. 내가 느끼는 죄책감을 씻기 위해 다른 인간을 거기에
매어 달아 피를 말려 죽여야 했던 정말 불쌍한 인간의 전형이 바로 십자가에 주어진 숙명이었던 것이다.
그 십자가에 예수는 스스로 매어달렸다.
왜 예수는 스스로 매어달렸다고 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문경에서 일어난 일에도 '스스로' 매어달린 어떤 동질성이 있지는 않을까?
만약 스스로 매어달린 것이라면 그도 역시 다른 인간의 죄를 위해 죽음을 택한 것일까?
그 어디에도 자신을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며 죽음을 택했다는 말은 없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예수의 죽음과 그 사람의 죽음이 우선 차이 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는 스스로 죽었으되 다른 인간의 죄를 위해 택한 죽음이었다.
그러나 문경의 그는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죽었는지 밝히지 않았고
그저 의문으로만 남아있다.
어떤 소설가는 참 묘하게도 그의 죽음을 자살과 타살의 공동작업의 결과라고 상상하며
그의 죽음은 참으로 선한 심성의 발현이라고까지 추켜세우고 있다.
그럴 일은 결코 아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라고 하여도 그것이 극단적인 자기애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면
가치 없는 죽음을 뿐이다. 진정한 희생정신은 전혀 다른 차원의 국면에서 파악될 수 있는
보다 가치있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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