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는 잘렸다.
아니, 짤렸다.
직위해제를 당했다고 한다.
워낙 여론이 뭇매를 치니 견딜 재간이 없었을것이다.
동영상을 찍은 애들이 그 선생의 평소 폭력이 오죽하면 찍었을까 싶다가도
그나마 간당거리며 처마 끝에 매어달려 있던 사도라는 맑은 고드름이
후두둑 떨어져 얼어붙은 땅바닥에서 박살이 나는 것같아
마음이 에인다.
세월 따라 사람의 생각도 변한다.
옛날과 달리 요새는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미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게 많다.
아이들은 날마다 미디어와 언론에 노출되어
시시콜콜한 연예계 쓰레기 정보마저도 신나게
외우고 다니는 지경이 되었지만
그나마 우리 불혹을 지난 나이에 이른 사람들은
그것조차도 제대로 못한다.
신문을 보고 있으면 눈이 침침한게 이젠 고만 신문도 접자고 생각이
들만큼 나이를 먹고보니 옛날 일이라도 어젯일같이 기억나던 것들이
가물 가물한다.
하지만 아픈 기억만큼은 잘도 기억난다. 우리 때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우리를 때리는 것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몽둥이가 부러지는 것도 예삿일이었고 신발이나 책이 날아드는 것은
그래도 양반축이었다. 쇳덩이 꼬챙이를 들고 엉덩이며 허벅지를 후려칠때는
까무러칠듯한 공포에 온 살이 다 떨곤 했다.
그래도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컸다.
군대에 가보니 그 때 미리 맞아둔게 차라리 예비 훈련이었다 싶을 정도로
구타가 심했다. 그걸 다 견디고 그냥 나오는 바보들이 아닌 이상,
군대에서 배운 구타 솜씨를 그대로 사회에 나와 활용하고 있다.
그게 대학생들이고 군대 갔다온 선생들의 행동의 요지인 것이다.
폭력은 갑작스레 생겨나지 않는다.
그것은 아주 질긴 유전자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 선생이 학생의 뺨을 손으로 쥐고 수 십차례 때리면서
자기 자신은 미처 몰랐을지 모르나 그것은 자신이나 혹은
자신의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던 과거의 어떤 기억들에
분명히 연관되어 있다.
그 폭력의 유전은 계속해서 대를 거듭하며 이어져 내려와
지금 이 밝은 현대에까지도 이어지고 있었고
미처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가는지 현실감각을 익힐 수 없는
학교라는 고정된 울타리안에 있던 그 교사가 하나의 피해사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때려서는 교육이 되지 않는다.
정말 때려서 교육이 안되기 때문에라기보다는
언론이나 책을 통해서 때리는 것이 잘못이고 학생이지만 잘못해도
맞는다는 것은 불가하다고 배우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집에서 자기 부모에게 맞는 아이가 부모의 폭행 장면을 촬영해
경찰서에 가지고 갈까? 그럴 아이가 몇이나 될까?
그건 자기가 맞아도 항거할 수 없는 어떤 상황이란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는 다르다. 엄연히 선생은 남이고 때리는 것은
사랑해서가 아니라 폭력이라고 배우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리는 것을 나쁘다고 하는 그 아이는 자기가 왜 맞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때리는 짓을 해서 잘못을 저지른 대가로 짤린
그 교사는 그렇다 치고, 맞은 그 아이는 자기를 때린 선생에게 과연
완전히 떳떳할까, 그리고 그것을 촬영해 신고한 아이도 과연 떳떳할까 하는 궁금증이다.
여러 명이 찾아가 그 선생에게 때리지 말아달라고 말할 수 있는 정황은 안되었을까?
그 폭력 앞에서 몰래 촬영을 해서 공권력에 기대고 언론에 폭로함으로써
선생을 물먹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까지, 그 아이들은 왜 선생에게 한 번더
설득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을까?
맞는 아이 역시 학교의 해명대로라면 몰래 대열을 이탈해 교사와 친구들에게
피해를 준 당사자이다. 이번일로 학교에서 그 학생을 정학이라도 시킨다면
다시 여론은 불타오를 것이다. 부당하다고 말이다.
아이의 잘못 쯤은 선생의 폭력보다 훨씬 못한 일일테니까.
아이니까, 학생이니까, 철이 없으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애써 감싸 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면 그 아이 역시 때린 선생에게 빌미를 제공했으니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과연 학교는 그 아이를 처벌할 것인가.
그랬다간 여론에 또다시 뭇매를 맞고 학교 위상이 무너지니
원칙대로 하지도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교사를 직위해제한 그 근거는 부당한
일에 대해 처벌하지도 못하는 학교측의 비겁함을 그대로 다시 뒤집어쓴
희생양이다. 이래 저래 그 교사는 잘못도 하고 큰 피해도 보는 중이다.
교사의 폭력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몰카로 찍어 신고하기까지 우리 아이들이 교사를 불신하고
얼마든지 배신할 수 있다는 생각에 치가 떨린다.
때렸다, 수십대를, 그리고 성기도 발로 찼다..라는 자체에만 포커스를 맞추면
어떤 이해도, 용서도, 관용도 다 필요없게 되고 만다.
살인자라고 해도 그 살인의 동기를 제공한 사람이 함께 처벌 받는게 법이다.
정상 참작이란 것도 있다. 교사가 아이를 때리는게 장난한 것도 아니고
그 아이가 무단으로 이탈해 걱정과 분노가 치민 교사에게서 나온 행동이라면
아무리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정상참작은 했어야하지 않았을까.
데이터로 저장되어 인터넷 공간에 영원히 떠돌아다닐 그 영상 속의
두 주인공은 비록 나중에라도 원만히 서로를 용서하고 과거 사실을 잊는다고
해도 그 영상이 존재하는 한 어딘가에서 또다시 누군가에게 시청되어지고
분노로 전염되고 과거를 들추는 하나의 빌미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그걸 찍는 아이들이 그런 것까지 생각했을리는 없고
또 그 당시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나 역시도 당시에는 참 분노했었다.
그러나 차분히 생각하고 중립에 서보려고 노력하면 문제의 핵심은
다른데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럼, 만약 선생이 그 아이의 뺨만 한 대 쳤다고 하자.
그런 정도였다면 아이들이 찍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원인제공의 한 축은
역시 그 교사가 맡은 셈이고 나머지 한 축은 그 아이가 맡은 셈이다.
그러나 아이는 용서 아닌 용서를 받게 되었고 선생은 책임을 물어
교직에서 사임하게 되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교직 생활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간의 모든 명예로운 추억들은 한낱 물거품처럼 제쳐지고
연금이나 혜택 등에서 제외되고 만 것이다.
나는 맞은 그 아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게 세상 일이
진행되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 사회는 이런 문제가 나타나면 무조건 처벌부터 한다.
칼을 들이대고 잘라내려고 한다. 왜 아픈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에 관한
생각은 누군가 시간 많고 학구열 높은 학자에게서나 하나의 연구 케이스로서
등장할 뿐이다.
다들 교사가 때리는 그 장면에만 집중하고 처벌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이게 바로 가는 사회일까?
우리 사회가 가진 폭력의 유전자는 제도나 환경으로 단숨에 변하는게 아니다.
무슨 약방문도 아니고 그냥 가서 제도 뚝딱 만들어 '하라'라고 전통문을 내리면
그대로 되어 효과가 가시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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