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대안학교를 나온 다음은?
어디 어느 대안학교가 좋다더라.
교장 선생님이 참 좋다더라.
완전 다른 교육이라더라.
아이들의 생각을 창의적으로 발달시키고 경쟁이 아닌 상생의 교육을 한다더라.
등등..
참 좋은 타이틀이란 타이틀은 다 가진 학교들이 제법 소개되곤 한다.
당장 내가 사는 지역에만도 언론에 수차례 언급된 학교가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는 사람들은 실상 지역 주민들보다는
외지 사람들이 더 많다.
외지에서 소식을 듣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되는 이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귀농 아닌 귀농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온다고 해서 바로 입학이 되거나 하진 않는다.
그러나 전학은 되니 일단 일반 농촌 학교에서 좀 배우고 나서
그 학교에 입학절차를 밟게 된다.
그 학교에 대해서 좀 아는 학부형의 말을 들어보면
지역 주민이 아니면 학교에서 받아주지도 않으니 당연히 지역 우선이라고들 하지만
결국 몇 년에 걸쳐 도시민이 이주하면서 아이들은 외지 출신 사람들로
채워지게 마련이라고 한다.
뭐 외지인도 들어와 살면 내지인이 되는거지 다를게 뭐가 있나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아니다.
외지인을 달리 외지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지역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은 학부형 모임을 하더라도
지역색이 있다. 촌스럽다고 하긴 그렇고 아무튼 지역 사람들간에는
서로 아는 처지라서 그런지 좀 좋은게 좋은거란 그런 분위기가 짙다.
요새는 워낙 배운 지식이 많은 부모들이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쉽게 쉽게 회의하거나 그러지는 않는다.
하지만 외지인들이 하나 둘씩 들어와 쉽게 입학할 수 있는 이런 지역 학교들에서는
곧잘 외지인들에 의해 문제가 발생하곤 한다.
한마디로 까탈스런 외지인들의 태도때문이다.
선생님께 선물 하나 하자고 돈을 좀 모으자고 하면 난리가 난다.
그래, 요즘 선생에게 선물한다고 했다가는 큰 일이 나는게 사실이다.
단 돈 만원만 내자고 해도 외지인들은 반응이 남다르다.
두 부류다.
만원이 뭐냐, 그래도 선생님 드릴 선물인데 10만원씩은 내야지, 하는 측과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돈을 걷냐, 교육청에 신고하겠다고 하는 극단적인 측이 있는가 하면
니들 맘대로 해라, 하는 식의 자포자기식 학부형들도 있다.
어느 지역이 다를까마는,
선생님 넥타이 하나 사다주는 것도 학부형 대표, 회장이 갖다주느냐를 두고도
말이 생긴다.
누구 하나만 덕을 본다는 묘한 심사때문이다.
말 안들으면 때려서라도 애를 교육시켜 달라는, 그야말로 전근대적인 발언을 하는 곳이
지역 사회 학부형 세계다.
그런데 외지인들이 들어오면서 애들 손도 못대고 가르치는게 요즘 선생님들이다.
죽도록 패는 선생이 어디 있나. 그건 아주 드문데 뉴스에 자주 나니 마치 대한민국
선생들은 죄다 폭력선생인것으로 비쳐지는 것일 뿐이다.
적어도 내가 사는 동네 선생들은 꿀밤 몇 대 쥐어박는것 외에는 아직 이렇다할 문제는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똑똑하고 많이 배운 외지 학부형 누구는 선생이 자기 애한테
심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정년을 한 두해 남긴 선생을 교육청에 고발하고
해직을 요구했다.
당연히 자라나는 아이에게 선생님으로서 아이의 마음을 다치게 할 말을 하면 안된다.
그게 우리 학부형들의 중론이었다.
그러나 곧 바뀌었다. 그 아이의 부모를 만나본 학부형 대표의 말을 듣고 나서부터였다.
아이가 선생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 부모, 특히 엄마 때문이다.
대단한 할렐루야 교인인 그 엄마는 목사 남편을 둔 참 신실한 사람이었는데
자기 아이는 앞으로 대단한 국가적 인물이 될 아이이고 절대 홀대 받아서는 안되는
아이인데 감히..라고 하는게 요지였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믿는 그녀는 결코 십자가에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했던 그 교훈을 실천할 마음이 추호도 없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그녀는 간음한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지려고 서 있던 사람들 중 한명의 수제자인양
교사를 저주하고 모욕하며 승냥이마냥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진정성이 받아들여지는데에는 진정성 외에도 하나의 요소가 더 필요하다.
바로 '인간미'인 것이다.
전혀 인간미를 찾아보기 힘든 그녀의 말과 행동에서 자식에 대한 절절한 기대와 사랑은
느낄 수 있었지만 인간에 대한 포용과 관용, 그리고 용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외지인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운동장 한 가운데로 고급 승용차를 몰고 들어가 자기 아이를
달랑 태우고 다시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 그 유유함은 결코 지역 학부형의 모습은
아니다. 잘나가는 강남 초등학교에 가면 그런 자기 모습조차도 밑바닥 수준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시골 한적한 운동장쯤은 넓고 넓은 운전연습장처럼 보였거나 자기집 앞마당 잔디밭으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왜 돈을 걷냐고 따지는데서부터 시작해서 외지인 학부형들의 참여의식은 선생의 교육방침에
대한 컴플레인에 이르러 그 빛을 발한다. 교육학을 했는지 아동심리학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외지인들의 정보력과 판단력, 그리고 당당함은 자신감의 극치에 이르러있다.
매일 보는 처지에 서로 숟가락 개수조차도 알고 지낼만큼 가까운 토박이들은
애들끼리 싸워도 그냥 제 새끼 나무라고 만다.
그게 로컬에서 살아가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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