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고전의 참맛! SC-8000을 다시본다-10

오션지 2010. 10. 2. 14:06
팔천이를 만난지 이미 꽤 지났다.

지금도 내 옆에서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빤히 지켜보고 있다.
무생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고 살아날까만은, 사람이 무엇에든 마음두기 나름이라.

사용하는 사람이 거기에 정을 두면 그만이다.
다시 조용히 팔천이를 쓰다듬어 본다.
물론 팔천이는 유구무언이다. 기계적 냉정함이 물씬 풍기는 팔천이가
유난스레 다정해 보이는 까닭은 팔천이가 나에게 주는 편리성이다.

전에 누군가 PDA로 무엇을 하는고? 라는 글을 올렸길래 한번 들어가 보았더니
과연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다 하는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서 느낀 점은
역시 디지털의 이기라고 모두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내는 아직도 자기 일을 할 때 수기를 사용한다. 장부가 손에 착착 달라붙는 맛이
일품이라나...하지만 나는 종이에다 뭘 쓴다는게 영 내키지가 않았다.
한때 동네 명필이라 이집 저집 다니면서 남의 조상 함자마저도 한문으로
척척 써올려주고 제삿밥 얻어먹고 온 적도 있는 나름의 재주도 가졌지만
한글을 쓴다는 것은 곧 내 손을 써야함이요 내가 손을 쓴다는 것은
노동이자 곧 대가가 초래된다는 엄연한 공식이 순수했던 나의 마음에
올가미가 되고나서부터는 글쓰기가 무척 주저되었던 것이다.

암튼, 종이에다 끄적대고 있는 마누라에게 괜한 짓 하지말고
나처럼 이렇게..이렇게..한번 써보라고 내주니 자기 삼송이가 못하는
신기한 짓이라 덤벼본다.

그러나 됴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아날로그적 인간이라 역시 글씨가
이리 미끄덩 저리 미끄덩 얼음판을 날고 긴다. 결국 제대로 글시가 써지지
않는 것을 두고 팔천이만 직싸게 욕을 먹는다.

하지만 한석봉 선생도 놀랄만한 나의 명필은 볼펜을 스타일로스 삼아
그어대는 환상적 필체로서 됴펜을 감동시켰고 인식오류율 제로에 가까운
입력 결과를 뿜어대었다.

국민 교육헌장을 줄줄 왼지 어언 수십년이 지난 오늘날,
세종대왕마마께서 그 시대에 이 몸을 보셨으면 당연 급제.
의기양양해서 단숨에 마누라 친구들의 전번과 이름을 물어
바람처럼 휘날리며 입력을 마쳤다.

그런데,
늘 그렇듯 나의 팔천이는 나에게 겸손의 의미를 가르쳐주었다.
입력을 다 마치고 잠시 나가서 작은 볼 일을 보고 온 사이
마누라가 얘가 왜이래...하면서 만지작거리고 있는 나의 팔천이는
그만 기절을 한 상태였다.

왜 그랬는지는 내가 도저히 알 길이 없고 나는 팔천이를 부여잡고
다시금 떨리는 손으로 똥침을 주었다.
아아...
그러나 나의 팔천이는 다시 나를 완전히 모르는 사람 취급을 했다.
모든 데이터가 날아가버린 것이다.

오후에는 팔천이네 병원에 전화를 때렸다.
상냥하고 아리따운 목소리의 간호사 누님이 받을 줄 알았는데
왠 산도적같은 목소리의 어빠가 받았다.
이것저것 팔천이의 신상명세가 오고간 후 드뎌 팔천이의
배를 갈라봐야 먼가 나오겠다는 괴기스런 답을 얻었다.

내 팔천이의 배를 갈라?
하긴...내 손에 전기 뱀장어 짓을 했을때부터 내 이 눔이 멀 잘못 먹어도
한참 잘못 먹었구나 싶었는데 병원아자씨가 그렇게 말하니
갈라보긴 해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아직까지 원인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몰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
나의 팔천이가 잦은 기절 현상으로 나뿐 아니라 마누라에게 남긴
불신의 주홍글씨는 과연 병원에서 퇴원함과 동시에 지워질 것인가..

나에게는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