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이었다. 오랜만에 럭웰 목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동안 바쁜 일이 있어서 만나지 못했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는데 얼마 있다가 귀국을 하니
오늘은 자기를 좀 도와달라는 것이다.
마침 간만에 시간도 나고 해서 학교에 올라갔다.
간혹 와보는 학교지만 요즘 느끼는 분위기는 착잡하다는 것이다.
부슬 부슬 늦겨울 비가 내리는 가운데 집에서 출발했는데 학교에 도착하니
어느새 비는 그쳐있고 여우 시집가는 날이기라도 한지 금새 하늘이 맑아졌다.
오르막을 올라가는 힘겨운 엔진소리가 오히려 힘차게 느껴지는 날씨가 되어가는 것을 느끼고
덩달아 액셀러레이터를 힘주어 밟았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마음먹도 도착한 학교는 다분히 양면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옛날 추억이라는 것이 기억속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학교에는 당시 내가 맡을 수 있는 냄새라는게 존재했다.
나는 차로 올라가지만 내 앞서 긴 오르막 길을 혼자서 올라가는 어느 후배의 뒷모습이
전혀 힘차보이지 않는다. 내 느낌만은 아니다.
학교에 도착해서 외국인 룸이 있는 그 옛날 신관에 이르렀을때는 마침 점심 시간이었다.
신관 올라가는 그 계단 옆에 몇 개의 테이블이 있는데 거기 후배들 몇이 앉아
잡담을 나누면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학교 분위기가 다소 을씨년스러운데 비해 그들의 모습은 싱그럽기까지 했다.
의외로운 모습을 보게 되자 올라오는 길에 느꼈던 착잡한 마음이 조금은
나아지는듯 했다.
럭웰이 있는 방으로 찾아가는데 마침 그가 나오며 커다란 박스를 짊어지고 나오고 있었다.
흑인인데다 덩치는 크고 키는 별로 크지 않은 사람이 우체국 인쇄가 되어있는 박스를 열심히
나르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엄연히 유학생이고 그들과는 다른 신분의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 속에서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을 본 것은 그의 외모때문만은 아니었다.
우체국에서 본국으로 보낼 물건들을 마지막으로 정리해서 쉬핑하려고 하는데 차가 없어
하는수 없이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그와 함께 우체국으로 가면서 조금 어이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학교에서는 그가 졸업식을 끝마치자마자 바로 다음날 룸을 비워줄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끈끈한 유대의식을 알고나 있었던가, 아니면 목사로서의 인격이 작동했던가..
아무튼, 그는 학교에 대한 약간의 불만스런 표현마저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아무쪼록 대한민국이 조선, 아니 고려, 신라, 고조선의 시대적 역류를 타고 지금 이 각박한 세상에
이르기까지도 여전히 저변에 흐르는 깊은 지하수같은 정신적 유산이 있다면, 그건 바로
'덤'의 문화다.
언젠가 읽은 기억이 나는 책이 있다. 전 문화부장관을 지낸 이어령 교수가 쓴 '신한국인'이라는
책이다. 그 책에서 한국인이 가진 장점 중에 바로 이 '덤'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어느 민족과도
다른 한국인으로서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고보니, 한국인의 '덤'의 문화는 나의 어릴적 기억 속에도 생생히 살아있다.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쌀을 사러 쌀가게에 가면 쌀가게 주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됫박에 쌀을 퍼서 쌀자루에 담아주는데 이 됫박 쓰는 방식에 그 '덤'이라는게 녹아있다.
쌀함지에서 퍼올린 쌀을 됫박에 담으면 수북히 봉우리가 생긴다.
당연히 한 되란, 그 봉우리를 뜻하지 않고 됫박의 윗면을 정확히 깎아낸 것을 한 되라 한다.
그러한 한 되를 만들기 위해서 쌀파는 쌀가게 주인은 작은 각진 막대를 이용해 됫박 윗부분을
깎아낸다. 이 때, 다 깎아내지 않고 끝 부분쯤에서 살짝 남기는 것이 바로 '덤'인 셈이다.
작은 행동이지만 이 '덤'으로 인해 쌀집 주인은 먹는 것으로서 남에게 인심을 썼다고 여기는 것이고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쌀가게 주인이 먹는 음식으로서 자신에게 각박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다. 무언이지만 이러한 작은 남김의 여유로서 우리는 세상을 좀 더 인정있게
살아왔던 것이다.
손님이 집에 찾아와도 밥을 퍼줄때 고봉으로 퍼주는 것이 손님에 대한 예의라고 여겼다.
집에 온 손님을 대하는 이의 마음이 각박하면 그 손님은 두 번다시 내 집을 찾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시 한국에 돌아올 생각이 있냐고 물었을때 그러지는 않을것이라고 했다.
네버인가라고 했더니, 사람 일은 알 수 없으므로 네버는 아니지만 다시 올지는 모르겠다고
재차 고쳐서 말했다.
당연히 나는 외국인 목사의 입장만 적고 있다. 학교 측에서는 누군가에게 방을 내주어야하고
그 시일이 맞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룸을 비워달라고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적어도
몇 년을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안팎으로 학교의 발전에 기여한 사람이다.
새로 들어올 사람보다는 최소한 '덤'의 혜택을 받을 이유와 자격이 있기 마련이다.
그는 돌아가면서 매몰차다고 여길만한 대우를 받는 것에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었다.
돌아가는 그에게 작은 악기를 선물하면서 이걸 불 때마다 당신을 친구로 여겼던 나를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그는 악기를 어루만지면서 섭섭한 표정을 지었고 자기와 가장 절친한 친구에게 내 연락처를
남겼노라고, 그와도 좋은 친구가 되어달라고 당부하고 떠났다.
내가 늙어 죽기 전에 그의 조국인 말라위에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람 사는 원리가 하나 있다.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이다.
요즘도 가끔씩 학교에 있는 다른 외국인들이 전화도 하고 도와도 달라고 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대부분은 전화로 도와주기도 하고 여러 이야기도 들어주고 그러지만
그들에게서 느끼는 공통적인 관심은, 액츠라는 학교에 대한 애교심..아니, 그 학교에 대한
신뢰보다는 자신의 학업을 유지하기 위해 너무나도 인간적인 노력을 하느라 분주한
고뇌의 일상들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외국인 학생들의 일부가 아르바이트로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이지경이 된 학교에서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87학번때처럼 학교가 지닌 뭔가 좀 다른 냄새, 고리타분한듯 하지만 투쟁의 느낌이 있었던 그런 분위기,
세련되지 않지만 울컥 하는 감정들이 살아있던 그 때를 다시 한 번만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의 이 삶의 역경들을 이겨내는데에 전혀 다른 차원의 활력소를 느낄 수 있을것 같다.
럭웰 목사가 돌아가는 길에는 가족을 다시 만난다는 설레임보다는
돌아가는 학생에 대한 학교측의 재촉이 부담스러운 무게로 다가왔던가보다.
끝까지 나의 이메일을 꼼꼼히 적어가며 나중에 꼭 도움을 청할 일이 있을것이라고 하는 그의 말에서
내가 여지껏 잘 느끼지 못했던 작은 우정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면, 그것이 유일한 소득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바쁜 일이 있어서 만나지 못했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는데 얼마 있다가 귀국을 하니
오늘은 자기를 좀 도와달라는 것이다.
마침 간만에 시간도 나고 해서 학교에 올라갔다.
간혹 와보는 학교지만 요즘 느끼는 분위기는 착잡하다는 것이다.
부슬 부슬 늦겨울 비가 내리는 가운데 집에서 출발했는데 학교에 도착하니
어느새 비는 그쳐있고 여우 시집가는 날이기라도 한지 금새 하늘이 맑아졌다.
오르막을 올라가는 힘겨운 엔진소리가 오히려 힘차게 느껴지는 날씨가 되어가는 것을 느끼고
덩달아 액셀러레이터를 힘주어 밟았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마음먹도 도착한 학교는 다분히 양면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옛날 추억이라는 것이 기억속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학교에는 당시 내가 맡을 수 있는 냄새라는게 존재했다.
나는 차로 올라가지만 내 앞서 긴 오르막 길을 혼자서 올라가는 어느 후배의 뒷모습이
전혀 힘차보이지 않는다. 내 느낌만은 아니다.
학교에 도착해서 외국인 룸이 있는 그 옛날 신관에 이르렀을때는 마침 점심 시간이었다.
신관 올라가는 그 계단 옆에 몇 개의 테이블이 있는데 거기 후배들 몇이 앉아
잡담을 나누면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학교 분위기가 다소 을씨년스러운데 비해 그들의 모습은 싱그럽기까지 했다.
의외로운 모습을 보게 되자 올라오는 길에 느꼈던 착잡한 마음이 조금은
나아지는듯 했다.
럭웰이 있는 방으로 찾아가는데 마침 그가 나오며 커다란 박스를 짊어지고 나오고 있었다.
흑인인데다 덩치는 크고 키는 별로 크지 않은 사람이 우체국 인쇄가 되어있는 박스를 열심히
나르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엄연히 유학생이고 그들과는 다른 신분의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 속에서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을 본 것은 그의 외모때문만은 아니었다.
우체국에서 본국으로 보낼 물건들을 마지막으로 정리해서 쉬핑하려고 하는데 차가 없어
하는수 없이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그와 함께 우체국으로 가면서 조금 어이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학교에서는 그가 졸업식을 끝마치자마자 바로 다음날 룸을 비워줄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끈끈한 유대의식을 알고나 있었던가, 아니면 목사로서의 인격이 작동했던가..
아무튼, 그는 학교에 대한 약간의 불만스런 표현마저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아무쪼록 대한민국이 조선, 아니 고려, 신라, 고조선의 시대적 역류를 타고 지금 이 각박한 세상에
이르기까지도 여전히 저변에 흐르는 깊은 지하수같은 정신적 유산이 있다면, 그건 바로
'덤'의 문화다.
언젠가 읽은 기억이 나는 책이 있다. 전 문화부장관을 지낸 이어령 교수가 쓴 '신한국인'이라는
책이다. 그 책에서 한국인이 가진 장점 중에 바로 이 '덤'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어느 민족과도
다른 한국인으로서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고보니, 한국인의 '덤'의 문화는 나의 어릴적 기억 속에도 생생히 살아있다.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쌀을 사러 쌀가게에 가면 쌀가게 주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됫박에 쌀을 퍼서 쌀자루에 담아주는데 이 됫박 쓰는 방식에 그 '덤'이라는게 녹아있다.
쌀함지에서 퍼올린 쌀을 됫박에 담으면 수북히 봉우리가 생긴다.
당연히 한 되란, 그 봉우리를 뜻하지 않고 됫박의 윗면을 정확히 깎아낸 것을 한 되라 한다.
그러한 한 되를 만들기 위해서 쌀파는 쌀가게 주인은 작은 각진 막대를 이용해 됫박 윗부분을
깎아낸다. 이 때, 다 깎아내지 않고 끝 부분쯤에서 살짝 남기는 것이 바로 '덤'인 셈이다.
작은 행동이지만 이 '덤'으로 인해 쌀집 주인은 먹는 것으로서 남에게 인심을 썼다고 여기는 것이고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쌀가게 주인이 먹는 음식으로서 자신에게 각박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다. 무언이지만 이러한 작은 남김의 여유로서 우리는 세상을 좀 더 인정있게
살아왔던 것이다.
손님이 집에 찾아와도 밥을 퍼줄때 고봉으로 퍼주는 것이 손님에 대한 예의라고 여겼다.
집에 온 손님을 대하는 이의 마음이 각박하면 그 손님은 두 번다시 내 집을 찾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시 한국에 돌아올 생각이 있냐고 물었을때 그러지는 않을것이라고 했다.
네버인가라고 했더니, 사람 일은 알 수 없으므로 네버는 아니지만 다시 올지는 모르겠다고
재차 고쳐서 말했다.
당연히 나는 외국인 목사의 입장만 적고 있다. 학교 측에서는 누군가에게 방을 내주어야하고
그 시일이 맞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룸을 비워달라고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적어도
몇 년을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안팎으로 학교의 발전에 기여한 사람이다.
새로 들어올 사람보다는 최소한 '덤'의 혜택을 받을 이유와 자격이 있기 마련이다.
그는 돌아가면서 매몰차다고 여길만한 대우를 받는 것에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었다.
돌아가는 그에게 작은 악기를 선물하면서 이걸 불 때마다 당신을 친구로 여겼던 나를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그는 악기를 어루만지면서 섭섭한 표정을 지었고 자기와 가장 절친한 친구에게 내 연락처를
남겼노라고, 그와도 좋은 친구가 되어달라고 당부하고 떠났다.
내가 늙어 죽기 전에 그의 조국인 말라위에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람 사는 원리가 하나 있다.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이다.
요즘도 가끔씩 학교에 있는 다른 외국인들이 전화도 하고 도와도 달라고 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대부분은 전화로 도와주기도 하고 여러 이야기도 들어주고 그러지만
그들에게서 느끼는 공통적인 관심은, 액츠라는 학교에 대한 애교심..아니, 그 학교에 대한
신뢰보다는 자신의 학업을 유지하기 위해 너무나도 인간적인 노력을 하느라 분주한
고뇌의 일상들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외국인 학생들의 일부가 아르바이트로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이지경이 된 학교에서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87학번때처럼 학교가 지닌 뭔가 좀 다른 냄새, 고리타분한듯 하지만 투쟁의 느낌이 있었던 그런 분위기,
세련되지 않지만 울컥 하는 감정들이 살아있던 그 때를 다시 한 번만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의 이 삶의 역경들을 이겨내는데에 전혀 다른 차원의 활력소를 느낄 수 있을것 같다.
럭웰 목사가 돌아가는 길에는 가족을 다시 만난다는 설레임보다는
돌아가는 학생에 대한 학교측의 재촉이 부담스러운 무게로 다가왔던가보다.
끝까지 나의 이메일을 꼼꼼히 적어가며 나중에 꼭 도움을 청할 일이 있을것이라고 하는 그의 말에서
내가 여지껏 잘 느끼지 못했던 작은 우정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면, 그것이 유일한 소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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