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눔-I think..

목사직 남발하지 말자

오션지 2012. 1. 5. 02:12

회개만 하면 목사가 된다느니,

은혜를 받았다 하면 찬양사역자가 된다느니,

성령 받았다 하면 간증자가 되어 전국을 돌아다니느니..

풍성한 열매를 맺기에 좋은 토양인 한국 교회에서는 참 훌륭한 인물들이 많은것 같다.

너무 쉽게 회개하고 너무 쉽게 은혜 받고 또 너무 쉽게들 목사가 되고 찬양사역자가 된다.

그리고는 또 너무 쉽게 변절하고 부끄러움을 끼치고 좌절하고 만다.

다 그런게 아니라 케이스바이케이스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느 것이나 부정한 것은 한 방울이지 모든 물을 다 흐릴만큼 많은 양이 아니다.

과거 고문기술자였다는 이 모씨가 목사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꽤나 전의 이야기인데 새삼스러운 것은 최근에 유명을 달리 한 김근태씨에 관한

기사를 보고 나서이다.

고문의 후유증세로 고생을 하다가 결국 편안한 여생을 마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에 관한 이런 저런 기사들이 봇물 쏟아지듯 나오고는 있어도 그게 다 고인이 살았을 적에 

나왔어야 할 얘기였음에도 이제서야 쏟아내는 기자들의 한심한 꼴들이 영 불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고인의 삶에 대한 애절한 마음은 없지 않다.

그렇게 민주화를 위해 고생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도 과연 얼마나 떠들어댈 것인가.

그러나 살아 있는, 적어도 버젓이 살아 있는 한 사람은 교회 안에서 축복과 평안을

외치며 자신의 회개를 무기 삼아 평안한 삶을 영위할 것이기 때문에 안타까움은 더욱 크다.


회개란 무엇인가.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 신 앞에서만 떠들어대며 울부짖고 가슴을 쥐어 뜯는게 회개일까.

돌이켜 고친다는 말이 회개이다.

어느 면에서 돌이켜 고친 면모가 보인다는 말인가.

고친다는 것은 마음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잘못된 것을 앎이 먼저이고 그 다음은 고치는 것이다.

과연 과거 고문 기술자로서 한 사람의 삶에 비참한 여운을 남긴 그가 잘못된 그것을 고치기 위해

행했던 일이 있었을까?

설마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계명대로 어느 날엔가 몰래 찾아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에게 사죄의 무릎이라도 꿇었을까 말이다.

그랬다면 그의 회개는 진정성에 있어서만큼은 어느 정도 인정 받았을지 모른다.


화려하진 않지만 과거의 지위에서 주어지는 혜택으로 평안히 살다가 

어느 날 감옥에 가니 무너져내린 삶과 자신의 현실에서 오는 공허감을 매울 수 있는

것은 종교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에게 찾아오는 종교란 대단한 효력이 있다.

평소에 듣던 찬송가보다 더 절묘하고 절실하게 들려오는게 감옥이란 곳일터.

매일의 평안 속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자신의 뒷모습을 낱낱이 밝혀주는 성경의 말씀들.

그리고 다시 그에게 찾아오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

회개의 처음은 이렇듯 자신에게 있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깨닫게 해주는

앎에 대한 빛인 것이다.

그 회개는 곧바로 열정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확장되고 포장되면서 헌신으로 화한다.

그 결과가 찬양이요, 헌신으로서 목사가 되겠다는 결심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적어도 자신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과 해결을 보았다고 믿는다면,

그렇다면 그는 인간에 대한 해결을 볼 생각을 왜 못했을까?


목사가 되어 설교를 하는 내내 자신이 고문이나 억압으로 피해를 주었던 사람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회개할지 고민해야할 평생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이 모씨, 이 목사가 아닌가.

과거 조 모씨도 폭력조직의 두목으로서 감옥에서 회개를 하고 목사가 되느니 하면서

신앙 간증까지 하고 다니다 결국 또다시 감옥 신세를 지는 일도 있었다.

사람이니까, 또는 완전하지 않으니까, 라는 변명은 교회에서는 하면 안된다.

그럼 세상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변명하지 말고 깨어 있어서 사람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진정성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게 마땅하다. 그런데도 교회들은 자기들의 세를 불리기 위해

그런 어설픈 회개자들을 접대하고 높여주고 전도에 활용하고자 하는 행태를 

멈추지 않고 있다.


진정한 회개에 관해 생각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