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Think Bible..

간증이란...

오션지 2011. 5. 17. 00:44

간증이란 단어의 의미를 알고 싶지는 않다.

설교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간증이란게 신앙 간증이라고 하는 말을 할때

사용하는 단어인가보다 하는 정도만 알고 싶다.

간증하러 다니는 사람들 참 많더라.

특히 연예인들이 왜 그리들 간증을 많이 하는지..

하나님의 은혜는 특히 방송국 드나드는 연예인들에게

많이 임하시나보다.

너도 나도 간증이다.

방송 없는 날에는 간증만 다니는가보다.

그렇게 다니면서 하는 간증 몇 번 들어봤지만 그냥 다 거기서 거기다.

그만한 인생 역경 겪지 않은 사람 없고

또 그만한 병치레 하지 않고 사람 많지도 않다.

그것뿐인가.

여기 저기 들려오는 소문에 의해서만도 수십명이나 되는 사람이

그런 병 앓다가 낳았다고들 한다.

그런데도 연예인이 당하는 고난은 왠지 좀 더 우리네 고난과는 달라보이나보다.

그저 어느 드라마 어느 방송에 나온 사람이라고, 그것도 한물 간 사람을

불러다 놓고 간증한다고 플랭카드 붙이고 사람 끌어모으려는게

교회가 하는 짓이다.

그렇게 사람들 모아놓고 거기서 거긴 얘기들을 억지로 듣게 하고

헌금이나 걷는다.

이런 교회들이 내 주변에만 해도 서너 개가 넘는다.

그런 발상을 하는 이들은 목사들인지 장로들인지 알 길은 없지만

다 그것또한 거기서 거기인 발상들이 아니고 뭔가.

 

간증이란게 뭔가.

정말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내 경험을 통해 드러내는 것 아닌가.

결국 들어보면 자기 자랑에 가깝고 자식 얘기라도 섞여 나올라치면

거기에 반찬이 붙고 국물이 붙어서 걸쩍찌근하게 늘어놓느니 그게 또 다른 자랑이다.

그리고는 양념처럼 노래 하나 꼭 집어넣어 불러낸다.

사람들의 심정을 훑어내는데에는 그저 만만한 노래 한자락이 최고인 셈.

흐드러지게 찬양 한곡조를 찬송인지 유행간지 잘 모르게 그럭저럭 불러내면

어느새 사람들은 버릇처럼 '아멘', '주여'라고 화답한다.

이 꼴이 영락없는 수십년 매너리즘의 발현이다.

연예인이라 그런지 감정 흉내도 잘 내고 곧잘 눈물도 쏟아낸다.

그리고는 자기 신세 타령도 하고 무슨 무당마냥 맞춰내기 게임조차도 일삼는다.

보다 못해 구역질이 나려고 해서 자리를 뜨려고 해도

목사님 눈치가 보여 뜨질 못하겠다.

뻔히 아는 스토리에 흘러가는 내막도 옛날에 본 어느 신파에 못지않은데

그걸 끝까지 들으며 교인들을 격려해야할 그 목사님의 애간장이야

어디 녹아내리지 않겠는가.

하지만 교회란데가 또 그런데인 것을.

다 끝나고 나서 허망한 마음을 추스리는데에는 역시 어설픈 칭찬 일색의 달변과

마무리 축도가 제격이다.

 

간증집회란게 결국 이렇듯 60년대에나 있었던 부흥사경회 모양을 그대로 본따되

그 내용은 최신식으로 화려하게 포장한 우습기 그지없는 집회가 되고 말았다.

차라리 여성회관 같은데서 하는 시국강연이 훨씬 알차지 않을까 싶다.

남는 것은 있다. 그곳에서는 그래도.

교회란데서 듣는 간증집회란 것에는 남든 것 보다는 드린 헌금이 아깝다는

생각마저 드는 것은 왜인가. 사람 구경하러 왔다 가기 때문이다.

남의 인생사 구구절절이 들어서 어디다 쓸까.

거기에는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고 구체적인 행동 지침도 없다.

그냥 자기 인생 이렇게 살았는데 지금 보다 다 은혜더라...라고 하는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일반화된 은혜만 있는데 그걸 보러 교회에들 간다.

그리고는 역시 멋드러진 찬송가 한 두 자락에 다들 마음을 여며잡고

그 밤을 마감한다. 내일은 다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 것을 믿는 믿음이나

있을까 걱정인데도 말이다.

 

연기하면 안된다.

탈렌트란게 받은 재능이 있어서 붙여지는 이름인데 그 재능을 남 흉내 내는

그 연기라는 것에서나 빛낼 일이지 교회란데 와서 그러면 안된다.

순수해보이려고 화장기없는 얼굴로 평범하게 차려입은 그 옷매무새마저도

연기란 생각이 들면 얼굴 보기조차 힘들어진다.

그렇게 집회 끝나고 나가면서 목사나 장로가 쥐어주는 봉투나 받아가는

그 이가 무슨 간증인인가.

돈 벌이하러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아니고 뭔가.

마치 뭐에나 대단히 쓰는 것처럼 받은 사례비를 고스란히 내놓고

가는 연예인도 있더라마는, 그도 이미 앞서 한 두 곳에서 넉넉히 받았기에

조그마한 시골 교회에서 주는 것쯤이야 다시 돌려준다 해도 그로 인해 자신 앞으로 내 걸릴 화려한

공치사에 비해 그리 비싼 대가는 아닐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리라.

 

그렇게 휑하니 가버리고 난 교회는 다시 불꺼지고 조용해진다.

그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안타까움만 남을 뿐이다.

목사는 가족과 행복한 저녁을 보내야 하고 장로 역시 따뜻한 안방에 누워

텔레비젼을 시청해야할 목표가 있으니 서둘러 집에 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

권사나 집사들도 총총히 교회 문을 나서면서 서로 배웅하고 인사하느라

바쁘다. 역시 집에가면 허드렛일에 뒷치닥거리에 잠자리까지 봐줘야할 식구들

생각에 마음이 제일 바쁘기 때문이다.

불꺼진 교회 안에는 오로지 침묵과 정적만 남는다.

십자가는 어두운 예배당을 지키는 유일한 파수꾼이다.

사람들의 온기가 사라져가는 장의자는 새벽의 찬 기운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한다.

강대상의 성경책마저도 침묵 앞에서는 어떤 권위도 없어지고 만다.

사람들의 정성을 모아다 주었던 헌금바구니 역시도 한켠에 오두커니 갇혀

서둘러 꺼내간 지폐들의 남은 냄새들만 간직한 채 무언의 대기 상태로 들어간다.

 

온갖 행사를 다 끝낸 후의 예배당에는 그리스도의 향기보다는 침묵만이 남는다.

내일 새벽의 찬송과 기도를 기대하기에 그나마 다행이지 오늘 저녁만 같은 집회라면

차라리 안하는게 낫지 싶다. 이 훈기 없는 삭막한 느낌을 떨치고 싶어도

사람들의 식어버린 신앙심은 희망마저도 애써 꺼버리는 흉기다.

모두들 떠들고 간다. 말하고 대답하고 듣고 움직이고 소리내고는 끝이다.

그렇게 속에 있는 것들을 내뱉고는 모두 그대로 자기들의 둥지로 다시 들어가버린다.

간증에서는 결코 남는 것이 없다. 미래보다는 과거를 얘기해야 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지나온 삶을 말하기보다는 앞으로 살아갈 일을 말하는게 좋겠다.

그래서 앞으로 잘 살아갔으면 한다.

변하지 말고 말이다.

간증의 폐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더 흉한 몰골의 뒷면이 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앞면만 보고자 한다. 외면하는 것이 용기있는 일인줄 알기 때문이다.

 

간증하지 말자. 믿음으로 그냥 살자.

내 삶이 이렇다고 말한들 요새는 감동받을 여유도 없는게 사실이다.

그냥 하루 하루를 신앙으로 살면 그게 간증이지, 모아두었다가 한 번에

얘기하는 것은 간증이라기 보다는 자서전이다.

그러니 간증하고 돈 받으려 하지 말고 그냥 매일을 신앙으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