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눔-I think..

목사와 교회, 그리고 성추행

오션지 2010. 10. 18. 11:59

목사는 먹사라 불리는 세상이다.

교회는 광신도 집합소라고 하고

기독교는 요새 개독교가 되어 있다.

목사들도 자신들이 먹사나 개독교인으로 불린다는 것을 잘들 알고 있다.

또 왜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지도 대략을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만은 그렇게 불릴 이유가 없다고 믿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목사와 교회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성경에 이른 대로 정의를 내리자면, 또는 신학자들이 말하는 교회의 정의는

믿는 자들의 모임 인데...

건물을 교회로 보는게 옳으냐 그르냐를 두고 각각 해답들을 가지고 있는터라

뭐라 딱히 말하기는 참 애매한 면이 없지 않다.

어쨌거나 교회와 목사는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임에는 틀림없다.

 

교회란 크게 두 가지 출발점을 가진다.

하나는 목사가 직접 세운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세워진 교회에 목사가 들어오는 형태이다.

둘 다 교회는 교회지만 목사의 입지는 사뭇 다르다.

목사의 입장에서야 당연히 자신이 세운 교회라야 보다 더 떳떳하고 자신감이 있을 것이다.

기존 교회에 들어간 목사는 여간해서는 자신의 입지를 견고히 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어느쪽에서 시작하든 목사로서는 스트레스의 중심에 서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목회란 즐거워야 하는 것 아닐까?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사실만을 살펴볼때에는

당연히 기독교인의 삶이 그런 고난을 답습해야 마땅할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렇게 괴롭고 힘든 신앙 생활을 해야할 마땅한 이유를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교인의 삶이 즐겁고 행복해야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삶의 의미를 느끼지 않을까?

그런데 목사의 삶이 고통과 절망 사이를 오고가는 것같이 늘 괴로움의 연속이라면

그 목사의 설교를 듣고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의 삶 역시 괴로울 것이 아닌가.

 

대부분의 목사들은 자신들의 목회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목회가 행복하다고 말하는 목사가 없을까만 그건 극복의 차원이지 싶다.

정치를 하는 국회의원이나 하다 못해 회사를 경영하는 경영인의 입장에서

과연 대한민국에 몇 사람이나 정치를, 경영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목회자도 그에 못지 않다.

겉으로 보기에는 배에 기름만 끼고 거들먹거리는 것같아 보여도

목사는 늘 교인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위치에 있고 아주 작은 일에도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다. 그야말로 가장 센치한 존재들이란 말이다.

 

그런데 외부에서 보기에는 목회자가 편하게 사는것 같아 보인다.

늘 교인의 집에서 용기와 희망, 사랑과 용서를 말하니 목사는 당연히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또는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에게 신앙을 가르치고 그들이 신을 영접하도록 해주는 일을 아주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말하자면, 어느날 아무 개연성 없는 어느 신도가 절을 찾아가

불상 앞에서 절 백번 하고 해탈했다는 것을 믿을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건 불가능에 가깝다.

스승이 없는 제자가 없고 출발점이 없는 경주가 없다.

길도 시작이 있고 바다도 처음 물이 나는 샘이 있는 것이다.

 

일반인이 어떠한 경지의 도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은 이미 그 '도'가 있기 때문이다.

없는 '도'를 새로 만들어내는 이야말로 우리 세상의 '영적 지도자'인 것이다.

아무나 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 '도'의 경지에 도달하도록 이끌어주는 임무가 바로 목사가 하는 일이다.

그런 일이 쉽게 이루어진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거기에는 많은 가르침과 관심과 정성이 들어가는 일이다.

그 일을 기꺼이 맡아서 해내는 일이 목회자가 하는 일인데 아마도 요즘 목회자들은

그런 순수한 목표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일, 예컨대 교회를 건축하는 일,

교회 명의의 땅을 사는 일, 교인들의 사업에 연계하는 일, 주변 기관들의 업무에 협조하는 일,

등등..실질적인 '도'의 추구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일들에 관련되다보니

목사가 목사같아 보이지 않고 교회가 교회답지 않아보이는가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어디 초가집에 교회 차리고 사람 모이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건 목사들이 그렇게 만든게 아니고 교인들 스스로가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흘러가는

모임의 성격상 점점 그렇게 만들어간 흔적인 셈이다.

그 결과 속에 목사가 들어오게 되면 또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고.

 

목사를 먹사라 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모든 목사에게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언론에 언급되는 몇몇의 목사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 보고 싶다.

그러나 고기가 물 밖으로 자주 나오면 낚싯꾼에게 잡히는 법이다.

교회 안에 있어야 할 목사가 교회 밖으로 나오기 때문에 문제가 드러나는 것인데

요즘 목사들은 그런 면에서 조심성이 덜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최근에 드러난 목사의 성추행 사건.

교회 안에서는 쉬쉬하려고 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지만

옛말 틀린 것 하나 없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

그러한 추문이 돌만한 행동을 한 것은 일단 목사의 부덕이다.

사실 관계야 따져봐야 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대단한 교회 목사를 법정에다

세우는 일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 교회 교인들의 세를 생각하면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테니까.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그를 정직시키고 일련의 징계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마무리짓고 싶어하지만

이미 교회 밖으로 나온 소문이라는 물고기는 수 많은 루머 낚싯꾼들에게 좋은 오락거리가 되고 말았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목사는 상상 이상으로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특히 대형 교회 목사들은 만나는 사람들의 층이 다양하고 특히 규모상 엘리트 그룹을 만나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는 여성들도 많고 특히 교회란데는 남자보다는 여성들이 더 많은 곳이고

설령 추문이 생긴 그 교회가 특성상 남성이 많은 곳이라고 해도 역시 실질적 활동은 여성들이 더 많은게

사실이고 그런 면에서 목사가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여성들인 것이다.

그런 여성들이 본의로 목사에게 접근해서 그런 추문을 만들어낸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간 처음의 몇 명으로 시작했던 교회를 그렇게 성장시키는 동안에

별 탈 없이 이끌어왔다는 사실은 이번 추문으로 완전히 상쇄되고 그의 현장감있는 추행에만

모든 포커스가 맞춰지니 재론의 여지가 없어지는건 당연하다.

 

목사라서 이해되지 않을 일은 없다.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닌지 얼마 안되어 있었던 일이다.

당시 내가 처음 다니기 시작한 교회의 목사는 상당한 카리스마와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연세도 지긋하고 설교하는 스타일도 아주 고전적이었다.

어린 나이의 내가 보는 그 목사의 이미지는 높은데에 있는 학같은 존재였다.

그는 여러모로 나에게 정신적인 지주였고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방과 후에 교회로 바로 갔던 나는 화장실에 가려고 교회 뒷문을 열고 따로 떨어져 있었던

교회 화장실로 가게 되었다.

때는 더운 여름이었고 그 화장실에는 목사가 앉아서 대변을 보고 있었다.

그 목사는 신문을 들고 있었고 신문 아래로 남성의 상징이 보였다.

하늘같던 목사의 모습은 내게 그 순간에 깨져 버렸다. 목사는 볼일도 안보고 사는 줄 아는 어린 나이였던

나에게 목사의 그런 모습은 충격이자 반격이고 신선함조차 포함하고 있었다.

그 후로 그는 나의 선망의 대상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내 신앙에 문제를 안겨주지는 않았다.

조금 더 세상과 사람에 대해 눈을 떴다고 해야하나..그런 느낌이었고 그 후로도

나는 그 목사의 설교에 많이 감복하고 신앙 생활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니 지금 어느 교회를 가든 목사에 대한 나의 시각은 동일한 인간으로서 보는 것이지

부러움이나 존경, 또는 막연한 어떤 관념적 선망의 대상 그런 것은 아니다.

아마 내 그런 시선이 눈치채어지는 순간에 목사들이 나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사도 사람이다. 이 말은 사람으로 안보는 것을 따지는게 아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을 목사도 한다는 말이다.

목사도 아내와 잠자리를 한다. 자식들에게 욕도 하고 남몰래 누구를 비난하기도 한다.

혼자 야한 영화를 볼 수도 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외부의 주장일 뿐.

목사가 그러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 오로지 신 만이 알 뿐이다.

그 일에 대한 책임은 신과 그의 문제이지 우리가 이렇다 저렇다 할 문제는 분명히 아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와는 더 이상 같은 공간에서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추행 문제도 그렇다.

목사니까 안된다, 어떻게 목사가 그럴 수 있느냐, 라고 하는 단순한 판단의 차원에서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그 기사를 내 준 어느 언론사의 의도는 한편 이해는 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정의를 앞세워 다른 이를 파괴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팩트를 알리는 역할만이 언론의 역할이라면 반쪽짜리 언론이다.

팩트와 함께 언론의 제 기능인 비판도 해야 하지 않을까?

기사는 비판보다는 폭로에 더 치중하고 있고 교회와 목사의 담합 같은 인상을 더 많이

주고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발달한 교계에서는 목사에 대한 어떤 정신과적 상담 채널도 없고

오히려 목사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면 안된다는 암암리 의식이 존재하고 있고

정신과 치료보다는 기도가 해결책이라는 웃지못할 넌센스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기도원에 가서 해결 못할 일이 없다면 대한민국은 기도원 하나만 있으면 된다.

금식해서 해결 못할 일이 없다면 죽어도 좋으니 이 나라 대통령이 금식하면 대한민국은

세계 일등 국가가 될 것이다.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이상한 선후 관계때문에 목사들은 언제나 외줄타기 인생을 살고 있다.

교인들은 언제나 좋은 설교, 좋은 목사, 좋은 교회, 좋은 성도들만 추구한다.

그러나 목사는 한 사람이고 수 많은 대중의 앞에 서는 사람이다.

그가 받는 무한한 압박감을 오로지 기도와 인내로 참으라고 하는 것은 우리 사회와 교회의 책임회피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이번 성추행 사건이 목사의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주지 못한

우리들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실 자체에만 집중해서 불필요한 흠집내기에

열중할 일이 아니라 이번 문제를 보다 원시안적으로 살펴보고 앞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논의가 교계에서도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