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이엇타임-Quiet time..

복받으러 다니는 교회

오션지 2010. 7. 29. 00:46

요즘 교회에서는 죄에 관한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는다.

늘 행복한 교회, 사랑이 넘치는 교회, 은혜가 넘치는 교회를 말하기 좋아하기 때문이다.

또 이 복잡한 요새 세상을 살아가려면 심각한 이야기보다는 복받는 이야기를 더 많이 해야

교인들에게 부담을 덜주기 때문이다.

아파트 매매가 안되고 세금은 내야하고 은행 잔고는 줄어든다.

게다가 발표는 경기 지수가 좋아졌다고 하는데 실물 경기는 점점 더 피부에 와닿도록 안좋아지고

있다. 날마다 들리는 소식은 뉴스만 틀면 어느 어느 곳에서 살인이 났네, 강간을 당했네, 성폭행을 당했네

하는 소리가 들려서 밥먹다 뉴스보는게 아주 딱 체할 노릇이 되고 있다.

 

그런 와중에 교회에라도 가서 마음의 안식을 찾고싶은 나에게 목사의 설교는 은혜와 사랑과

행복과 밝은 미래를 전해주어야 마땅한 법이다. 그래야 교회 갔다가 온 느낌도 들테고 말이다...

하지만, 과연 이게 기독교의 진정한 모습일까?

아니 복음의 참된 면모일까?

요즘 별 시덥잖은 목사들이 참 많다.

하도 교회에서 어릴때부터 목사 욕하면 벌받는다는 식의 '주의 종' 개념을 밥먹듯이 들어서인지

목사에 대해 불만을 가지려들면 소화덜된 거북한 속이 되고 만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요즘 목사들 죄와 벌에 관해서는 설교하기꺼려한다. 교인 수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교인들 눈치보며 설교하려 하는 목사는 이미 목사로서의 자격을 일부 상실한 셈이다.

교인들 입맛에 맞게 설교하는 것이 무슨 설교인가? 그냥 교인들 대신에 책읽고 요약해서, 또

신문에 나온 기사들 평가해서, 적절하게 교훈이 될만한 성경구절 찾아서 일년 52주 밖에 안되는

그 기간 한주한주를 채워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말이다.

 

불행한 일이다.

이래저래 불행한건 목사나 교인이나 다 매한가지다.

교인은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행복과 사랑과 은혜에 관해 생각해보지만

결국 이 사회의 어려움과 세계적인 위기감의 근원은 나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악 때문이기에

마음속 한곳에서 어쩔 수 없이 인류로서 나누어지게 되어버린 그 죄책감으로 인해

불편한 마음은 떠나지 않는다.

 

똥 누고 밑 덜 닦은 느낌처럼 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이상한 이 무거움은 내 안에 지고 있는 죄악 때문이다.

다른게 죄가 아니다. 평생 살면서 남한테 해롭게 한 적 없고 땅바닥에 기어다니는 개미

한마리에도 신경을 쓰며 살아온 백로같은 이에게도 절절이 스며있는 죄악은 있다.

그 죄는 바로 우리 자신에게 충실할 뿐, 신과 타인에게 절실하지 못했던 이기적인 자아인 것이다.

 

네 형제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대 명제는 세상을 향해 임금의 첩지처럼 내려진 그리스도의 명령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결코 남에게 풍성하지 않다.

그저 자기 복만 챙기면 된다.

내가 남에게 떳떳하면 남이야 어떻게 살건 관계치 않으려 한다.

그러니 교회에 나가서 내 죄악을 드러냐는 것이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또 그런 부담을 지면서까지 교회에 다니고 싶은 마음이 없기도 하다.

하지만 교회에서 죄와 벌에 관한 설교만 안해준다면 그럭저럭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며

그 안에서 즐기는 자기 만족과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얻어지는 수익들이 주는

탈콤한 안정감 속에 영원히 머물고 싶어지는 것이다.

 

복을 빌어주는 교회, 복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교회, 그리고 마치 복의 근원인것처럼

설교하는 설교자는 회개해야 한다. 교회는 복받으러 가는 곳이 아니다.

 

'내 아버지 집은 기도하는 곳이다'라는

위대한 명제 앞에서 목사들은 기도하면 복을 받는다고 변론할것이다.

그럼 기도가 먼저인가 복이 먼저인가의 문제도 명확히 알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죄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죄인의 기도는 듣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결국 복을 받을 수 있는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아니, 정확히 말해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죄악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이고

그 원리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믿어야 한다.

 

이 일련의 과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의 문제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요즘 교회들 안에서 얼마나 절실하게 죄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성폭행범도 용서해주는 것이 죄에 대한 우리의 바른 자세인가.

죄 없는 자가 와서 먼저 돌로 치라는 그 예를 들어 성폭행범도 용서해주어야 한다고

내츄럴하게 가르치는 것이 과연 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바른 태도일까?

 

아니다.

그렇게 말하기 어려워하는 죄에 관한 이야기는 바로 이런 경우에

그 포문을 열 수 있다. 교회 안에서조차도 성폭행의 기회는 존재한다.

말과 행동으로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성폭행..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심금을 찌르는 칼날같은 설교로 우리 본성속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는 죄성의 문제를 명확하게 헤집고 수술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

설교하기 위해서 반드시 죄에 관한 언급이 우선되어야 하고 그 정의가 무엇보다도

명확해야 한다.

 

그러니 교회에서 이토록 중요한 죄의 문제를 명확히 다루지 못하고 그냥 복받기만 빌어주는

그런 1차원적인 행태에서 벗어나야 옳다.

일부의 교회가 이런 식으로 한국교회를 말아먹은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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