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동물의 차이.
아이들과 밥을 먹다 인간의 진화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은 진화의 과정에 있다. 동물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인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다른 동물들보다 더 노력했을 것이다. 그 결과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개발되었다. 물론 돌연변이일 수도 있고. 그건 전두엽의 발달이다.
인간은 가장 약한 동물의 하나로써 생존을 위해 다양한 방식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다른 동물들과의 관계에 변칙을 시도함으로써 살아남는 것이었다. 그 변칙은 바로 거짓말이다. 두렵지 않아도 두려운 척해야 하고 두려워도 두렵지 않은 척해야 했기 때문에 그런 거짓을 행할 수 있는 뇌의 발달이 절실했을 것이다.
동물은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만 인간은 얼마든지 반대로 행동할 수 있고 심지어 (스스로를) 속일 수도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인간이 동물 뿐만 아니라 다른 인간도 속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만이 뇌의 발전을 통해 습득한 특별한 능력이고 다양한 능력결핍에도 불구하고 종의 최상위에서 다른 종들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 되었다.
인류의 조상이라는 아담 얘기가 나왔다. 사람들은 대부분 아담이 그냥 단번에 만들어진 존재라고 알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아담은 아이로 태어난 게 아니라 성인으로 태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생존하고 존재하기 위한 본능들은 아담에게 어떻게 들어왔을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경험을 토대로 완전한 성인으로 성장해 나간다. 밀림에서 늑대와 오랫동안 지낸 인간은 늑대처럼 살아갈 뿐 인간으로 살아가지 못한다. 그것은 인간이 학습과 경험을 통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담은 존재하자마자 그런 능력을 모두 부여받았다.
이 놀라운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더구나 아담은 하와와의 성관계를 통해 자손을 번식하는 일도 척척 해냈다. 말은 어디서 배웠을까? 무엇인가를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분노하거나 애정하는 모든 감정들을 아담은 누구에게서, 어떤 방식으로 배웠을까?
창세 시대의 아담이 가진 신비는 어떻게 만들어졌느냐에 있다기보다는 그가 지녔던 선지식이 어디에서 온 것이냐에 있다. 하나님이 모두 주입했을까? 그것조차도 신비라 할 수 있겠는가? 창조될 당시 아담의 나이가 몇이었을까? 그때까지 터득해야 할 것들은 도대체 어떻게 아담 안에 존재하게 되었을까?
아담은 우리가 쉽게 믿어버리는 것처럼 그냥 하나님이 뚝딱 만들어낸 존재가 아닐 것이다. 인간의 진화 안에 하나님의 섭리가 존재한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그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만이 생존을 위해 특별한 능력을 개발시켰을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동물과 자연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더 친화적이며 덜 적대적이어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 섭리 안에서 어쩌면 물리적인 역사로만 인간사에 존재하던 하나님을 인간의 두뇌가 발달하면서 개념화하게 되고 실존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라고 여겨도 신학적으로 하나도 문제될 것이 없다.
이런 이해가 세상을 보다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준거틀이 되어도 좋고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반성문의 기초가 되어도 좋다. 또한 인간 스스로에 대한 존중심이 약해지게 만드는 폭압적인 전쟁광들에게 회개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신학은 오직 신학적으로 이해하는 범주 내에 속한 사람들만 구원하려고 하고 인간답게 처우하려고 하는 편협한 학문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모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섭리 자체가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편협한 신학에서 벗어나야 한다.
생존을 위한 처절한 노력으로 진화한 인간의 뇌는 자연계의 원리를 터득하자 곧바로 다른 인간을 짓밟고 살상하는 데에 거의 모든 지식을 쏟아부었다. 다른 종을 필요 이상으로 살상하는 잔혹한 존재이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유능한 생물이라 자처한다. 물론 그 유능한 존재는 살인과 거짓말과 도둑질을 열심히 해대는 볼썽사나운 존재다.
다만, 생물학적으로 진화한 인간에게 여전히 신비는 남는다. 사랑과 도덕의 관념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것이다. 이 관념은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여전히 밝혀지지 않는 근원을 지니고 있다. 고대 철학자들은 그것을 윤리나 도덕으로 규정했고 신학은 신의 사랑의 흔적으로 기록한다.
어쨌거나 인간에게 사랑의 감정과 도덕심이 진화의 또 다른 영역으로 남아 사라지지 않는 한, 인간이 동물과 다르며 특별한 존재일 수 있다는 자격 하나는 남겨지게 된다. 인간이 사이보그와 다르게 결코 빼앗기지 않는 속성 하나를 지녔기 때문에 프로그래밍될 수 없고 루틴화될 수 없는 유일한 변수이자 불규칙이 바로 사랑이나 도덕심이라는 데에서 이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사의 절망 속에서도 위로를 삼게 되는 것이다.
신학은 인간을 전적 타락의 존재라 상정하며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사랑과 용서를 통해 본래의 상태로 회복하는 이상적인 비전을 던져준다. 그리고 아주 인격적이고 실제적인 신의 사랑의 행위를 통해 그 타락의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한다. 그렇다면, 중대한 질문이 태어난다. 왜 인간은 그 사랑을 거부하는가? 아니 거부할 능력을 지니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자유의지? 어지간한 족쇄 하나쯤은 쉽게 풀어주는 이 만병통치약 같은 자유의지란 것이 정말 존재하기는 할까? 광활한 대지를 뛰어다니며 아무 제약 없이 놀다 어느 날 이상한 담장이 있어 살펴보니 그건 나를 가둔 장벽이 아닌가? 하는 깨달음처럼, 그 자유의지도 뇌의 진화의 결과물이고 그것이 자유의지임을 깨닫는 다른 자아가 또 있음으로 해서 인간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비밀의 정원에 한 발을 내딛게 되는 것이다.
인간에 의해 '발견되어지는' 어떤 것도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 오직 인간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주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에서부터 온 '비밀'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