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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오션지 2020. 5. 31. 00:02

소유냐 존재냐

"권력을 숭배하는 어떤 사람이 공식적으로는 무슨 사랑의 종교(기독교)의 신도임을 고백했다고 할 때, 그에게 권력에의 믿음은 내밀의 종교이며 이른바 그의 공식적 종교, 이를테면 기독교는 한낱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셈이다."_에리히 프롬,<소유냐 존재냐>(까치,차경아 옮김) 194쪽.

"국가 위에는 인류가 있다."_괴테.

"애국심이 전부는 아니다."_에디트 카벨(영국 간호사로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 프랑스, 벨기에 병사들의 도망을 도와준 이유로 독일군에 의해 총살을 당하기 전날 밤 가지고 있던 책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여백에 남긴 말.

"중세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사회와 관련하여 신 앞에서는 만민이 평등하며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더할 수 없이 소중하다는 견해를 폈다. 또 그들은 경제적인 면에서 노동은 인간존엄의 근원이며 비하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것, 어떤 인간도 자신의 복리와 무관한 목적을 위해서 이용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 임금과 물가는 정의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정치와 관련해서는 정의의 정신으로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 법과 그 적용은 기독교적 정의의정신으로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는 항상 상호간의 의무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중세의 이상에는 모든 국가와 민족은 하나의 커다란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어 있다._프레데릭 B. Artz, 1959, 455쪽(위 에리히 프롬의 책에서 재인용)

오늘날 우리 사회는, 또는 국가는 어떤 국가정신을 바탕으로 유지되고 있을까?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의 시대도 이제는 어느 정도 지나갔다고 봐야 하는데 여전히 우리 사회는 이념대립의 현장성이 있다. 에리히 프롬의 정확한 지적대로 종교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작동하는 처참한 지경에 머물고 있는 한은 기독교가 이 사회와 국가에 대해 유의미한 역할을 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종교의 역할을 요약한 프레데릭의 글은 이미 중세 시대부터도 인류에 대한 일반적 요청들이 있어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일까? 세계는 만민의 평등을 비웃듯 인종차별과 계급차별, 경제적 차별을 당연시하고 있고 노동과 인권은 극단적 선택에 의해서만 재고되고 있고 상업주의는 경제이론의 설국열차를 타고 계급투쟁의 불쏘시개 역할을 할 뿐이다.

인류를 하나의 공동체로 여기는 것이 본래 기독교의 지향이 아닌가? 창조의 개념을 성서의 맨 앞에 놓고 인류를 하나의 조상에 귀속시키는 것이 바로 그런 지향성이다. 그러나 인류는 바벨탑 이후 천형처럼 짊어진 차별의 속박을 여전히 벗지 못하고 있다. 자연과도 불화하고 있어 재앙이 터져나왔다. 이제 곧 해양오염이 극대화되고 거대한 공기순환장치가 고장이 나면 폭풍과 해일, 그리고 기후변화가 인류를 덮칠 것이다.

성서를 인간의 구원에만 국한시켜버리는 편협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언제쯤 우주적 구원의 개념으로 발전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화해라는 단어는 인류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다. 자연과의 화해정신이 확산되어야 공장폐수를 줄이고 산업폐기물 불법매립과 석화연료 사용중지, 육식의 감소, 유전자변형의 제한 등 인류공통의 주제에 대한 세계적인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고 제도가 마련될 수 있다.

기독교의 미래는 개인의 구원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수행하면서도 동시에, 아니 더 확장되어 인류의 화해를 도모하고 그 방법으로 자연과의 화해를 위한 노력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언제까지 인간 자신만을 위한 구원에 매진할 텐가? 과거 지구는 대단히 큰 공간이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정말 손바닥만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코로나라는 바이러스가 전세계로 퍼지는 데 걸린 시간을 한번 되새겨보면 분명해진다. 몇 시간이면 말과 문화와 종교가 다른 사람들에게 바이러스가 옮겨간다. 이제 세계는 거의 한 민족적 존재로 변해가고 있다. 함께 공생해야 할 존재다. 따라서 미래사회에 우리가 강조하고 확장시켜야 할 기독교 정신은 우주적 화해와 평화의 개념이다.

이 개념이야말로 그리스도 정신의 기본이다. 창조의 본질로 되돌아가는 셈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라는 대명제를 가시적으로 수행하는 길이기도 하다. 우주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섭리는 항시적이며 호혜적인 만물의 유지에 있다. 생육과 번성은 오직 인간에게만 주어진 선물이 아니다. 인간이 만물을 손상시킨 후에 그 생육과 번식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협의적 해석을 벗어나야 한다.

에리히 프롬은 기독교의 이데올로기적 한계성을 지적하며 종교가 기능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소유가 아닌 존재로써의 종교여야 하고 도구가 아닌 원리로써의 기독교라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건축자의 연장처럼 잘 활용해왔던 기독교라는 종교를 이제는 우주적 화해와 평화의 원리로 활용하기 위해 가능한 확장의 신학이 무엇일까를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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