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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주의 사회

오션지 2020. 5. 31. 00:01

감상 인민재판.

사람을 기관포로 총살을 시킨 북과 다른 것 하나가 있다면 남한에선 언론과 댓글로 사람 하나를 공개처형시키고도 민주사회라고 주장한다. 검찰수사가 진행되고 사실관계가 명확해진 다음에 법적인 책임을 물어 사퇴시켜야 할 사람을 국민여론이 70%라는 뉴스를 내보내며 몰아간다.

하긴. 내가 이런 글을 어디 다른 SNS에다 쓰면 대뜸 윤미향 쉴드를 쳐준다는 거지같은 반응이 있을 수도 있겠다. 조국 얘기 쓰면 조국 쉴드, 이재명 얘기 쓰면 이재명 쉴드.ㅎㅎㅎ 박근혜 얘기도 쓰면 박근혜 쉴드인가? 홍준표 씨도 나름 여당이 귀담아 들어야 할 얘기 할 때가 있고 심지어 내눈을 바라봐님도 정치적인 안목이 있다. 그런 얘길 쓰면 다 쉴드인가? 웃긴다.

법적으로 무죄추정의 원칙이란 것도 국민의 여론, 다분히 감상적인 바, 이것에 따르면 윤미향은 이미 범죄자요 교수형감이다. 일단 줘패고나서 아니면 미안하다고 한마디 하면 되는 그런 세상이다. 나중에 밝혀지면 거봐라 하면서 나댈 인간들도 꽤 많다. 그러나 아니라면? 정황이 있고 사정이 있어 봐줄만 하다면? 그때는 또 어떤 리얼미터 여론조사가 나올 것인가?

검찰수사가 진행 중인데도 이미 재판은 끝난다. 북에서 한다는 인민재판은 차라리 정당하다. 간음한 여인을 끌고와 예수의 대답을 듣고 꼬투리를 잡아보려고 했던 자들조차도 최소한 그 현장에 있었다. 비록 부끄러움이나 자기반성이 일어 꼬리를 감춘 것으로 묘사되기는 했으나 죄에 대한 그들의 집착에 가까운 거부반응은 대단히 수준높고 양심적이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시민정신은 뇌피셜일 뿐이지 죄인을 손쉽게 처벌하고 판단내리는 폭력을 서슴없이 저지르면서도 죄책감은커녕 불편함조차도 못 느낀다.

인간은 모니터 뒤에 숨어 수도 없이 많은 정신적, 심리적 살인미수를 저지르면서도 전혀 처벌받지 않는다. 현장성만이 진실이란 말을 되새겨본다. 우리에게 더이상 현장성은 없다. 작은 돌멩이 하나를 던져 산을 만들고 거기 깔려죽게 만드는 엄연한 가학과 살해행위들이 온라인에서 버젓이 벌어지는데도 감각은 점점 무뎌져 간다.

식자라는 자들마저도 한구덩이에서 똥을 뭍히며 이 난리를 거들고 있다. 그들에게 지성은 장식품이고 감성은 불앞의 휘발유일 뿐이다. 열린 사고의 첫걸음은 의심하는 것이다. 물음표를 던지는 데에서부터 사고는 출발한다. 그리고 감성은 인간에 대한 가장 깊은 예의를 지향하는 동력이다. 눈물을 흘려줄 수 있는 여유로움이 감성이다.

상식은 바로 이 지성과 감성 사이에 존재하는 가교다. 우리는 드러난 사실을 감성으로 받아들이고 지성으로 왜곡하는 심각한 현대적 질병에 사로잡혀 있다. 상식은 가교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수억 원을 횡령했다는 의혹에 대하여 미리 결론을 내려버리고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일단 분노하고 만다.

인민재판의 현장에서 더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는 말은 너도 똥뭍은 개니 물지 말라는 게 아니다. 평등이라는 고상한 가치에 대해 한번 깊이 재고하라는 말이다. 죄인이 되어 엎어져 있는 한 인간을 바라보는 또다른 인간으로써 평등의 심리를 회복해보자는 얘기다.

입만 아프다. 이런 얘길 쓰고 앉아있는 내가 한심할 뿐. 페친 중의 한 사람은 어느 날 홀연히 페북을 떠났다. 이유는 하나였다. 더는 이 고단하고 한심한 뇌피셜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것 같다. 적어도 누군가의 등신짓거리는 안 볼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