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아무리 열심히 읽더라도 성경도 열심히 읽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는 나도 뼈근본인 게 맞는 것 같다. 큐티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고 역사적 예수에 반하는 관념적 예수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내게 예수는 혁명적이지 않은 혁명가요 전투적이지 않은 전사다. 좌파적이며 비판적이면서도 따뜻한 인본주의자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 안에 살아숨쉬는 예수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한 하나님의 아들이다. 아무리 먼 데까지 사상의 여행을 나왔어도 내가 돌아갈 본향 같은 정신의 귀착점은 예수 그리스도. 어줍잖은 영적 순례랍시고 오만가지 책과 사색으로 컬러풀하게 장식해도 막상 자기에게 어떤 '상황'이 닥치면 결국 인간은 근본적인 물음과 해답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물론 신화적 현상에서는 이미 거의 탈피했다. 목적에 부합하는 결과물의 하나로 텍스트를 이해하는 관점도 생겼다. 역사적 변곡점들이 지닌 한계와 위험성들이 신학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도 어느정도는 파악하고 있다. 종교와 사회의 소개팅이 낳은 불편한 관계에 대한 의식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나는 예수에 대한 엄연한 확신을 지니고 있다. 멋짐뿜뿜의 근본주의 정신세례를 말하는 게 아니다. 저만치 갔다가 돌아오는 게 상당히 그럴싸하게 보이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다. 누가 보면 다행이랄 그런 방황의 끝도 아니다. 예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내게는 살아움직이는 영성의 뿌리이지만 여느 시덥잖은 신학이나 사상, 경험담에서 활용되는 상징적인 소재는 더욱 아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얄팍한 눈물 코스프레용으로 여기는 한심한 감상주의 신앙에 팔아먹은 것도 아니다. 예배나 기도의 필요성을 택배박스 열듯 북북 찢어발기는 성급함처럼 마구잡이로 훼손시키는 입장도 아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 하나는, 그동안 알고 있었던 신앙이라는 것의 정체가 지금의 내 신앙과는 너무 결이 다르고 하찮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내 사상의 토대가 되고 울타리가 되는 신학이라는 것의 정체 역시도 얼마나 편협한지, 한계가 많은지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의 나라는 존재는 신학적으로는 세계주의적이고 신앙적으로는 네오근본주의에 이른 것 같다. 말하자면 신학의 범주를 확장하고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끊임 없이 하고 있고 신앙의 뿌리는 지키면서도 기존의 껍데기는 탈피하려는 노력을 지속하는 그런 상태라고 해야겠다.
페이스북을 통해 느낀 것이지만 저급한 비아냥으로 신학과 신앙을 비틀려는 경향은 동의하지 않는다. 패거리 신앙이고 게토화된 변태적 신학이란 평가밖에 내릴 수 없다. 하등 무용지물이다. 진지한 논의와 사색의 결과를 탐구하는 자세야말로 세상에 유익을 끼칠 수 있다. 그래서 좀 지켜보던 것들을 다 정리했다.
나도 이젠 나이가 먹어가는 모양이다. 촐랑대는 정신의 쾌락적 사유에는 별 흥미가 없어진다. 웃기는 얘기지만 쫌 수준 있는 농담과 사유의 컬러를 지향하고 싶다. 고리타분해지는 것일 테지. ㅎ 그래서 다시 성경을 붙잡고 읽는다.
구약을 공부한 예수는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선언을 했다. 제대로 모르면 할 수 없는 이야기다. 수천 년을 유지해왔던 자기 민족의 신앙체계에 대한 변화의 요구였다. 왜 그게 필요한지는 몸소 실천하며 보여주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낸 그의 신적 행동들, 인간적 실천들에 대해 의심할 '필요'는 없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오해에 찌든 사람들은 사실로써의 예수와 의미로써의 예수 사이에서 고민하는 게 역사적 예수 탐구의 내용이라고 유치한 착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라는 말의 참 뜻은 역사 속에서 예수의 행동과 정신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목적에 부합하는 필요가 낳는 결과물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결론으로 나아가야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결혼을 했느냐, 물 위를 걸었느냐를 가지고 기존 신학을 비웃는 건 한심한 말장난이다. 그런 논의에는 예수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도로표지판이 필요한 이유는 행정당국 입장에서는 가이드다. 그러나 그 표지판을 보지 않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존재해도 존재하지 않는 게 된다.
이처럼 성경의 어떤 내용이 누군가에게 가 닿아서 의미있는 것이 되어야만 그 성경은 실재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런 맥락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논했던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 진리냐! 누군가에게는 소설책일 수도 있고 나에게는 절대적 진리일 수 있는 이 성경에 대해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의 논의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성경으로 돌아가는, 아니 성경에 심취하는 것은 결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자기반성이나 정체성의 회복 같은 것도 아니다. 적어도 신의 존재를 이해하고 믿고 결단한 사람이라면 성경은 어머니의 태와 같이 절대로 내 존재와는 뗄 수 없는 명확한 본향인 것이다. 그러니 성경을 읽지 않고 신학을 논하면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