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를 까면 껍데기가 벗겨진 그 안에 또 다른 껍질이 있다. 실은 껍질이 아니건만 그것은 앞서 깠던 껍질과 아주 유사하므로 다시 까고자 하는 마음이 샘솟는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계속 양파를 까다가는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다 까고보면 양파는 그냥 양파일뿐.
그 안에 어떤 기대했던 것도 있지 않다.
사람의 마음이 양파같지는 않을 것이다. 설사 양파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건 양파라기보다는 양파같은 사람이지.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없다는 말도 있다.
어느 사람 주머니를 끄집어내 털어보면 동전 하나 들어있지 않더라도 먼지는 나온다.
그걸 가지고 트집을 잡자면 먼지 한 톨도 문제가 된다.
동네 양아치들이 아이들을 겁주면서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너 주머니 까서 백원만 나와도 죽는다!"
없다고 해도 까면 나온다는 확신에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정말 황당한 경우는 까서 뒤진 주머니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경우다. 그럼 그 아이는 죽지 않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까?
아니다. 그냥 보내줄 양아치들이라면 양아치 자격증 상실이다.
"그렇다고 백원도 안가지고 다니냐?" 가 그 아이를 때리는 새로운 빌미가 된다.
장관이 사직을 했다. 대통령은 군말없이 받아들었고.
2년7개월이라는 긴? 수명을 마치고 껍데기 홀랑 까진 양파마냥 발가벗겨진것처럼 그렇게 또 한명의 장관이 갔다. 본인의 심정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시원하다고 콧노래를 부를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 인생의 내막을 누가 다 안단 말인가. 장관직에 대해 남다른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거나 아니면 국가 발전에 대한 투철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봉직했었다면 이번 사직서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제출했을 것이지만, 기왕에 이렇게 된거 그냥 훌훌 털어버리고 이 골때리는 폭로전에서 빠지자는게 그의 생각이라면 콧노래가 나올법도 하다.
딸이 아버지 인생을 망친것처럼 되어버린 이상한 형국에 아직도 분풀이가 덜 된 사회적 소외자들은 여전히 칼날을 장관과 딸에게 돌리고 악다구니를 해대고 있을것이지만 그간에 그가 한 일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평가를 해주는 언론 하나쯤을 기대하는 건 총대매라는 주문일것이다.
뭘 했듯, 무슨 마음으로 일했든 열 개를 잘하고 한 개를 못하면 그것으로 몰매를 맞는다.
현대판 마녀사냥은 대통령을 위시해 쓰레기 파먹는 노숙자에 이르기까지 무차별로 이루어지고 있다.
뭘 잘하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고 오로지 저 자가 뭘 잘못했는지에만 관심이 있고 그것들로 종이와 게시판을 꽉꽉 채우는 분노에 찬 사람들..행복지수가 너무 낮아서 자살할 용기는 없지만 누군가가 자살해주기를 엄청나게 바라고 있는 '그들'이 우리 사회에 잠재하고 있다.
잘잘못을 가리자면 장관 뿐만 아니라 개인이 저지르는 잘못도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한다. 이 사회의 구성원이 아닌양 말이다. 나는 서민이고 넌 가진 자니까 네가 저지르는 잘못이 더 크고 그 벌도 더 크게 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당연하다는듯이 한다. 그런데 반대로 뒤집으면 난 서민이니까 혜택을 덜 보고 넌 가진자니까 혜택을 더 봐야한다는 논리에 대해서는 당연히 거부반응이다. 이건 왜일까.
개인주의의 팽배가 무서운 이유는 서로 대화도 안하고 교류도 없고 관심이 없어지는 현상때문이 아니다.
정말 무서운 개인주의는 내 존재가 속해 있는 사회로부터 심리적으로나 실질적으로 벗어나 있는 상태가 일어난다는 사실때문이다. 나는 이 부정의 사회에 속하지 않는다는 생각, 나는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의 행렬에 속해있지 않다는 생각이 무서운 것이다. 이런 잘못된 착각은 어떤 사회적 문제 현상을 보면 쉽게 손가락질을 하고 욕을 하고 엄청난 분노와 저주를 그 대상에게 아무런 각성 없이 퍼붓게 된다.
그러나 사회는 결코 개별적이지 않고 유기적이다. 누군가의 부패는 곧 나에게 이유없는 이익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극단적인 예지만, 어떤 건설업자가 국회의원에게 뇌물을 바치기 위해서 준비하는 고가의 도자기는 도자기를 만든 사람에게 물질적 이익을 가져다 준다. 도자기 만든 이는 전혀 모를 뿐 아니라 책임도 없다. 그러나 한 사람의 부정 부패가 다른 사람에게는 이익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렇게 소비한 금액만큼 그 건설업자는 자신의 공사비에 추가하게 되고 공사비를 지출하는 정부에게는 국민 세금 낭비라는 부정적 요소로 돌아온다. 그러나 공사를 하청받는 업체에서는 또 다시 이익으로 적용된다.
건설업자는 개인적으로 돈을 챙겨 자신의 배를 부르게 하지만 그 돈으로 부동산을 샀다면 그 부동산의 최초 소유자에게는 또다시 이익으로 작용한다. 결국 이런 식으로 모든 사람들은 서로의 이익을 나누어 가지게 된다는 기본 논리가 성립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는 이 부정부패가 사회에 꼭 필요한 선순환의 논리란 말인가.
아니다. 부정 부패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사회적 지탄을 받아야 마땅한 이유는 그 부정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도 주어져야할 정당한 이익의 기회가 의도적으로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그가 아니라 다른 누가 정당하게 기회를 잡았다고 해도 앞서 돈의 흐름은 일반적으로 비슷한 맥락에서 사회적 순환을 하게 되어 있다.
이번에 유장관의 딸이 특채로 뽑힌 것을 두고 언론에서는 참으로 유치하게도 엄마가 대신 결근 전화를 해주었느니 하는 기사까지 마구잡이로 실어댔다. 그 기사를 쓴 기자의 정신상태가 유아기적 분열증세를 동반했는지 어땠는지 알 길은 없지만, 밝혀야 할 사실과 적시해야할 사실보다는, 즉 그렇게도 기자들이 중시하는 팩트에 의존하지 않고 감정에 의존하도록 의도적으로 이끌었다는 부분에서는 딱히 뭐라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정작 다루어야 할 기사의 내용이란, 유장관의 딸이 실제로 특혜를 입었는가 하는 문제와 그로 인해 동등한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함으로써 그런 부정이 사회적으로 왜 지탄받아야 하는지를 밝히는 일이었다.
요즘 중,고등학생들은 신문을 잘 보지 않는다. 하지만 검색은 잘 한다. 포털 사이트에서 보다 자극적인 제목으로 헤드라인을 잡아야 뜬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하더라도 그 내용만큼은 아직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들이 읽기에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해주었어야 한다.
정당한 기회를 잃게 만드는 공직자들의 부패, 그리고 그것이 낳는 결과가 어떤가를 제대로 르포report하는 기자 보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거기에 어머니의 전화는 중요하지 않은 사항이다. 집안이 통째로 다 해쳐먹는구나 하는 한탄이 나오게 이끌어가는 언론은 오히려 역기능의 역할을 자청한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 중의 몇 %나 한 점 오점 없이 청렴하게 살아갈까.
내 부모나 조상 중에 호적을 고치거나 일제의 압잡이였거나 공산주의자였거나 남을 배신했거나 남의 돈을 빌리고 떼먹었거나 살인이나 강간이나 도둑질이나 폭력을 행해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현재의 나는 깨끗하니까, 손가락질 할 자격이 있으니까..하는 오만한 생각을 하기보다는 진실이 무엇인지 제대로 판단하고 스스로를 먼저 반성해보는 지성을 갖추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쉬운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