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학원의 한 아이가 며칠을 쉬다가 다시 왔길래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평소에 빠지지 않고 잘 나왔고 밝은 아이였는데 며칠 전부터
시무룩하고 말 수가 적어진데다 친한 친구들 말로는
아버지가 아프다고 했던 기억이 있어서 오늘은 조심스럽게 물어본 것이다.
아이의 대답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필리핀에서 2년 정도 공부하다가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안되는
아이는 집에 관해 이야기할때면 늘 아빠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했다.
내가 아내의 학원 차량을 자주 운행하기 때문에
틈만 나면 아이들과 사소한 이야기로 웃고 떠드는데
아이들로부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좀 엄격한 편인
아내에게는 잘 터놓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나에게는 그래도
편하게 쏟아놓곤 한다.
아이의 아버지가 세상을 뜬 것에 대해 아이들간에 소문이 돌고 있었다.
암에 걸렸는데 치료를 거부하고 의사의 소견을 따르지 않아
심해져서 일찍 죽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얼마전 돌아가신 나의 처작은아버님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가족의 경사가 있어 잔치에 오신 때를 생각해보면
그래서는 안되는데도 그런 자리에서 짜고 맵고 기름진 것을 아주 잘 드셨던 것이 기억난다.
위암 환자에게 좋지 않은 것은 마치 일부러 더 그러기라도 하는 것처럼
더 많이 드시는 것을 보고 주변의 가족들이 말리는데도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결국 얼마전에 돌아가셨다.
포기하는 것일까?
돈이 많이 들것을 염려해서 이왕에 심각해진 것, 더는 비용을 들이지 말고
그냥 이대로 가는게 낫다 싶은 심정이란 말인가.
나의 경우라면, 나는 어떨까...
이런 저런 생각에 마음이 좀 착잡해진다.
나와 일면식 없고 목소리한번 들어보지 못한 한 사람의 죽음이 여간 신경쓰이는게 아니다.
아이를 오늘 처음 다시 봤을때 내가 물었다.
뭐라 할 말은 없고 그냥, "그래...아버지 편히 잘 보내드렸니?..."
아이는 내 눈과 마주치자 금새 눈시울이 빨개지면서, "네..네.."
그러고는 다시 제 친구들을 따라 조르르 달려간다.
애써 감추는 빛이 넉넉하다.
캐물어 무엇할까...슬픔은 그냥 지나가는 것이다.
옛말에 산 사람은 살아야지..하는 말이 있다.
시간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진 망각이라는 자정작용을 통해 인간은 삶도 죽음도
기억의 저편으로 보내버리는 탁월한 기능이 있다.
아이에게 삶의 연장을 스스로 포기하고 죽음을 기다렸던 아버지의 모습
역시도 주변과 친구들, 변화의 생활들을 통해 아주 빠르게 기억 저편으로 하나의
점처럼 작은 순간이 되어 자리만 차지할것이다.
포기란,
내가 하기 때문에 쉬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기에 더욱 안타까운 것이다.
그것을 예견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어느새 인간의 내면은 본능적으로 그걸 알기 때문에
포기를 택하는지도 모른다.
자살을 택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난간에서 뛰어내리면서 자기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 아이들에게는
바로 이런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나는 어느새 잊혀질 것이다' 라는..
끝내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 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일깨워줄때에야말로 '포기'라는 것은 없어질 것이다.
목회자는 사람들에게 외쳐야 한다. 큰 소리로..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