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옛날하고는 많이 다르다.
집안의 가장으로서의 자리도 분명치 않고 여성이 옛날과는 달리
남녀동등의 대접을 받고 사는 시대가 되다보니
말하자면 386세대인 내 또래의 젊은 가장들도 어느새 아내의 자리를
크게 인식하고 살면서 더불어 자식의 입장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고 산다.
부모님은 어려서부터 장남인 나에게 여러가지 특혜?를 주시곤 했다.
동생들에게는 한번도 사주지 않으셨던 카세트 같은 것도 내게는 선뜻
사주신 적이 있었고, 나의 독서생활의 시작이자 내 인생 최대의 축복이랄 수 있었던
세계 문학전집을 초등학교 5학년때에 사주신 것을 지금도 감사히 생각할 만큼
장남인 내게는 뭔가 동생들과는 다른 태도로 대해주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면서 동생들은 나에게 한번도 오빠, 형만 위하셨던
부모님께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모르지, 뒤로는 어떤 흉을 잡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동생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그렇지 않기에 믿는 것이다.
이러한 맏이에 대한 부모님의 자세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실상은 이런 맹목적인 맏이우대는 내게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다.
동생은 오래전부터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부모님을 모시고 산다고 봐야 옳은 일이다.
연세가 점점 드시면서 경제력에 있어 큰 역할을 못하시니 동생의 부담이 커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간혹 드리는 용돈이란 건 부모님의 며칠 유희에만 겨우 사용될 뿐,
왠만한 일에는 모두 동생이 뒤치닥거리를 도맡아 한다.
미안한 마음이 늘 앞서도 최대한 자주 찾아뵙고는 있지만
부모 자식간도 몸이 떨어져 있으면 마음도 멀어져있는 법이라
늘 입이나 마음으로 떼우는 나하고는 동생이 모시는 부모공양의 삶의 질이라는 게
매우 다르다.
그러나 동생은 부모와 같이 산다는 이유로 흉허물이 더 잘 보이고
부모님도 나를 만날때마다 동생 흉을 잡으실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 말씀에 맞장구를 치며 그럴듯하게 동생 흉을 함께 보게 되지만
이날 이때까지 동생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나 태도는 늘 한결같이 고마움이다.
좀 부족하고 때로 서운하게 할 때가 있는 것은 사람 살아가는 모습의 일부일 뿐이다.
부모와 자식간에 깊은 혈육의 정은 그만큼 오히려 자유스러운 것이기에 그렇다.
체면 치레나 하고 외양에 조심스러워야할 사회생활과는 다르기 때문에
진심이 보이고 실수가 보이며 약점도 잡히는게 가족 아닌가.
그런데도 부모님은 나와 함께 살지 않기 때문에 내 허물이나 약점을 못보게 되는 것이고
반대로 가뭄에 콩 나듯 가끔 들러 용돈푼이나 찔러주는 못난 장남에게
지나친 기대와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다.
아침에 큰아이와 작은 아이가 모처럼 토요일 아침 텔레비젼 시청 자유시간을
베풀어준 아버지의 자상함에 대한 보답으로 티격태격 말다툼을 벌인다.
뭐 뼈대있는 집안도 아니고 무슨 구구절절이 외워야할 가훈이 있는 전통있는
가정도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한 형제지간에 다툼이나 월권등의
물구나무 서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게 내 지론인데 녀석들은 오늘 아침
아직 밥숫가락도 채 놓지 못한 내가 바로 뒤에 있는데도 얼른 숟가락 내던지고
하는 짓이 리모컨을 누가 장악하느냐 하는 이유로 다투는 것이었다.
형제지간에 다툼이란 있을 수 있다.
무슨 이유에서건 다툼이 있을 수는 있지만 경우가 아닌 때가 따로 있다.
다투는 경우 내가 주로 아이들에게 혼을 내는 이유는 형과 동생의 질서가
무너지는 경우이다.
아이들도 수차례의 선행학습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정도는 순서를 가리지만
그래도 형에 대한 태도가 이건 아니다 싶은 경우에 반드시 제재를 가한다.
결국 오늘 아침에도 녀석들은 서로 리모컨을 가지고 누가 먼저냐의 문제로
다툼을 일으켰다. 약간의 제재로 분쟁은 해결되었지만 괜히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져서 마음이 복잡하다.
세상이 좋아져서 요즘은 누구나 할 것없이 평행선이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남편과 아내도 평행선, 부모 자식간에도 친구처럼 평행선, 형제 지간에도 모든
권한과 혜택에서 평행선을 그렸으면 하고 바란다.
그러나 세상에 질서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질서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부모가 쌍둥이를 낳아도 반드시 순서를 정해주어야 가정이 평안해진다.
남녀간에도 질서란게 존재해야 할 일의 구분이 생기고 도움이라는 미덕이
발생하는 법이다. 모두 평행선상에서 대접받기로 한다면 이미 세상은
불공평의 극치인 셈이다.
어느 집이나 초상이 나면 장남의 이름을 부르고 상주가 누구냐를 따진다.
결혼도 장남이 먼저 가야한다는 고정관념이 아직까지는 있다.
또 집안이 잘되려면 맏이가 잘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여전히 지배적이다.
형만한 아우 없다는 속담도 아직은 사회에 통용되는 말이다.
부모가 병들어 몸져 누워 있는데 둘째가 이민을 가면 둘째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이해적이지만 장남이 이민을 가려고 하면 병든 부모 등지고 간다고 손가락질 받기 십상이다.
장남이 부모를 모시고 살면 당연한 것이 되지만 둘째가 부모를 모시면 그만한 효자가 없게 된다.
그런데도 맏이는 어떤 의미에서건 부모를 대신하는 자리를 늘 차지하고 있고
어딜가나 맏이라고 하면 일단 반은 접고 들어갈 수 있는 위치가 된다.
간혹 이런 개념들이 고정관념이 아닌가..하고 생각해오고 있었지만
역시 나도 유교적 전통에 뿌리깊이 못박힌 사람인가보다.
큰 아이에 대한 기대가 둘째에 대한 그것과는 좀 다르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큰 애에게는 뭔가 좀 더 기대를 하게 된다.
아이 하나만 키우는 집에서는 이 심정을 잘 모를지도 모른다.
그래서 늘 형만 편애한다고 생각할까봐 둘째에게도 참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지만
그래도 은근히 큰 애에게 여러가지 기회나 권한을 주는 내게 아이들이 불만이
있을 것이다.
간혹 저녁에 외출하거나 자리를 비울때 아이들만의 세계에서
모든 권한은 큰 애에게 주어진다. 여태 한번도 실수 한적 없이 동생들을 잘 돌봐온
큰 애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던 차에 며칠 전 둘째와 막내가 하소연을 한다.
"왜 엄마 아빠 없을때 오빠만 대장이예요?"
마땅한 대답을 하기가 애매했다. 내 이 긴 심정을 녀석들에게 이해시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앞장을 서야 뒤따라오는 사람이 편하니까 그렇지"
너무나 수사적인 대답이라 갸우뚱 하면서도 한가지는 느껴지는지 둘 다 말이 없다.
내가 오빠에 대한 강한 신뢰가 있다고 하는 사실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숙명같은 사실이지만 아이들이 내가 혹은 아내가 없어진 빈 자리에서
누가 그 자리를 매김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기 때문에
나는 굳이 이해시키려 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십자가를 지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도 탐내었던 그 자리에 아무도 동참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십자가마저도 의도치 않게 지고 가게 되었으니 말이다.
인생이란 이런 것인가보다. 화려한 궁극의 권력에 입맛을 다시고 있다가
그 권력의 실체라는 것이 사랑과 희생이라는 것, 그리고 생명 버림이라는 진실을
깨닫게 되었을때 아무도 그 권력에 대해 미련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숙명처럼 짊어지게 되는 것이 십자가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