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교 홈페이지에는 약 2개월에 걸쳐 메인게시판에 올려져있는 영상이 하나 있다.
바로 지난 개강때 고세진 총장께서 했던 개가예배 설교 영상이다.
소리가 작아서 최대한 볼륨을 키워야 겨우 들을 수 있었는데
낮에는 소음때문에 어려웠고 밤 늦게 혼자서 그 영상을 모두 보았다.
영상에서는 열렬한 희망과 기대와는 달리, 고총장님의 차분하면서도 다소는 비장하다할만큼
어두운 느낌의 설교가 이어졌다.
중반이 넘어갈 즈음, 고총장은 갑자기 목이 메인듯 울먹이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죄인...'이라는 대목에서는 감정에 복받치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영상을 보는 내 마음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비록 옛날이긴 하지만 매년 개강 예배때는 한박사의 활기차고도 열렬한 신본주의 강의가
설교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던데 반해 고총장의 이번학기 개강예배 설교는
자기 반성과 회한의 많이 묻어나는듯했다.
내막을 모르고서야 그 영상은 보는이로 하여금 동정심을 유발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우리는 인간이고 우리 내면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용서라는 DNA가 입력되어
있기 때문에 그 분의 그러한 설교가 우리 마음을 전혀 흔들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다만, 지난번 이사회의 진행 과정과 결과, 또한 교과부의 권고내용, 재판의 결과, 또는
총장 해임이라는 큰 변수를 앞에 둔 총장의 입장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분의 설교를 자기 회한이라는 통렬한 자아반성에서 나오는 눈물이라고만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른채 라는 고총장의 설교를 들으며 한가지 드는 생각이
있었다.
지난 주였다.
아이들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문득 내가 큰 아이에게 물었다.
"상원아, 아빠가 너를 더 사랑하는것 같냐, 아니면 엄마를 더 사랑하는 것 같냐?"
역시 아들의 반응은 심란한 표정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대한건 아니지만 아들은 어쨌든 선택을 해야한다는
생각에 무심코 대답했다.
"엄마를 더 사랑하겠지"
이 대답의 이유는 간단했다.
평소에 나는 아이들에게 "너희들 없이는 살아도, 엄마 없이는 못산다" 라고
말해왔다.
아이들로서는 아직까지 자아가 덜 형성되어 있고
자신의 가치가 어느정도인지 자각하기 어려우니 당연히 이런 내 말을
어른들의 '확고한 사랑'쯤으로 나름 이해했을지 모른다.
아들이 질문했다.
"근데, 왜 아빠는 엄마를 더 사랑해? 우린 자식이잖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 미리 생각해둔건 아니지만
문득 빠르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말씀이 있었다.
"형제를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하겠지만
사랑은 기술적인 요소가 많다.
누구나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사랑해야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내 아이들은 내 뱃속에서 태어난 존재들이다.
자식은 사랑해야할 존재가 아니다. 자식이란, 사랑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수십년간 전혀 다른 환경과 부모의 품에서 살다가 나에게
선물로 주어진 존재다. 사랑해야할 존재인 셈이다.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사랑해야할 존재에 관해 늘 말씀하신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나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모두, 사랑해야할 존재를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이미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끊어진 사랑의 관계를 극복하기 위한 생명과 직결된 계명인 것이다.
아들에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주었다.
"너는 사랑하는 존재이지만, 엄마는 내가 사랑해야할 존재니까
엄마를 더 사랑한다고 할 수 있지. 네가 아빠를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
정확한 대답을 못하는 것처럼 나도 너를 사랑해야할 이유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넌 내가 사랑하는 존재니까.
그러나 엄마는 내가 사랑해야할 존재고 예수님도 당신이 사랑해야할 존재인
우리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거야. 예수님의 사랑이 소중하고 값진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닌, 사랑해야할 사람들을 사랑하는 행동을 하셨기
때문이야"
녀석이 알아듣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고총장의 설교를 들으면서 이 대화를 깊이 생각했었다.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고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몰랐다고 고백하는
모교의 총장의 현재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는 진정성의 여부를 떠나서 하나님 앞에서의 충분한 자기 고백이
되고 그 눈물, 애써 감추려했던 그 눈물이 산제사가 되어 하나님 앞에
상달되기 위해서는 그 눈물만큼 진정한 행동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총장은 지난날은 잊자고 했다. 앞으로 학교의 발전을 위해서 모두가 마음을
하나로 모아 앞을 바라보고 희망찬 시작을 하자고 부탁하는 것으로 설교를 맺었다.
그러나, 앞을 바라보고 나아가기만 하기에는 너무 많은 상처가 있다.
지도자는 혼자서만 앞으로 간다고 해서 누구나 다 따라오는줄 착각해서는 안된다.
전쟁터에서 적진을 향해 고귀한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버리는 병사는
훌륭한 지휘관이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기 감정에 복받쳐서 눈물을 흘리는 총장, 그 눈물만을 보고 모교의 밝은 미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소통이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해왔던 일들이 다시 일방적인 방법으로
전진하라는 요구에 묻힐 수는 없다.
모두 용서하고 잊기 위해서는 그 용서의 대상들이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부디, 총장은 학내 사태로 인해 상처받은 후배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후배들은 지난 모든 일을 '내려놓고' 대화합의 성전으로 모여야 한다.
그것이 사랑의 방법을, 의미를 제대로 몰랐다고 고백하며 눈물을 흘린
총장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진정성'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