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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점프

오션지 2009. 10. 13. 15:03

지난주 명절에 장인을 뵙고 젊은이 못지않은 노년의 투지를 느끼고 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춘천에 있는 어떤 번지점프장에서 장인께서는 당년 65세의 고령에 점프를 하셨다고 했다.

번지점프라니..

왜하셨을까? 라는 질문은 놀라움에 아내와 내가 동시에 어안이 벙벙해진 한참 후에야

찾아온 궁금증이었다.

 

장인은 군대에서 일등상사로 제대하신 퇴역 군인이시다.

평소에 걸걸한 목소리와 더불어 진취적인 군인의 성향을 제대로 갖춘 보기드문 쾌남이시다.

비록 내 능력이 모자라 귀하게 키운 딸을 아직까지도 생활전선에서 부려먹고 있는

못난 사위이지만 맏사위라는, 나로서는 거저얻은 권세때문에 한번도 내게 큰소리 치거나 꾸지람을

제대로 하시지도 못하셨다.

그런 장인이셨다.

어릴때부터 아내에 관해서는 특별하리만치 애정을 쏟으셨다.

월남전- 베트남에서 빗발치는 총탄을 피해 간신히 목숨을 건지셨을 때도

왼쪽 군복 포캐뜨에 넣어둔 돌바기 딸 사진으로 위로를 삼으셨던 장인이시다.

그렇게 소중한 딸을 전도사라는 비쩍마른 미래 불투명한 나에게 주시려니 그 마음이 오죽하셨겠는가

하는 께달음이 이제 겨우 10살인 딸아이 하나를 키우는 아버지가 되고보니 찾아온다.

나의 장인은 아직까지도 사위의 덕을 제대로 못보고 계신다.

주변이 변변치않은 내 탓에 손에 물한방울 안묻히고 살아야할 운명이었던 아내도

장인의 눈에는 항상 애처로운 수선화 한떨기 같은 존재다.

그 미안암이 이번 명절에는 번지점프 이야기를 하시는 장인 앞에서 더욱 컸다.

장인은 제대 후 음식장사를 하시면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았지만

세월 앞에서는 장사없다는 속담의 장사가 힘쎈 장사가 아니라 돈버는 장사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도록 사업은 거듭 실패를 겪었고 장인은 그간 모아두었던 자본을 조금씩

소진해가고 있었다.

그 후유증이 요즘에 우리 대부분이 겪고 있는 경기침체와 맞물려 이제는 더이상 새로운 것을

해보려고 도전하는 것 자체가 무모할 정도로 사람들 심리가 위축되어 있는 상황에 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장인이 택한 것은 번지점프였다.

생각의 전환이 빨라 무슨 뜻일까 하고 좀 생뚱맞은 것같기도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장인은 새로운 결심의 의지 표현으로 번지점프를 택한 것이라고 나에게 설명하셨다.

장인이 점프대에 올라가자 거기 교관이 안된다고 내려가라고 했단다.

하지만 장인은 끝내 고집을 꺾지 않고 거기서 뛰어내렸다. 물론, 각서까지 쓰고.

내년 여름에는 사위 셋을 모두 데리고 거기 가서 담력을 보자 하시는데 나는 이미

간담이 서늘해서 내년 여름 에어콘이 필요없게 되었다.

놀이기구 타는 것도 차일피일 미루며 애써 좁쌀심장을 숨겨왔던 작은 동서는

저만치 물러서서 내가 반대라도 하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 역시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오기를 부려보고 싶을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공을 위해서 스퍼트를 다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경주에서 진 것이다.

그것은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정신 자세가 되어있지 못해서 진것이다.

문제는 경주에서 진 이유를 불문하고 자신에게 스스로 승리했다고 자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에게 승리하지 못한 것이다.

비록 꼴찌로 들어왔어도 수많은 관중이 그 꼴찌를 향해 격려와 환영의 박수를 보내주는

올림픽의 정신은 자기극복과 승리에 대한 찬사인 것이지 동정은 아닌것이라 믿는다.

 

장인은 요사이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계신다.

이미 시작했고 나는 오늘도 그 곳에 가서 오전에 일을 조금 도와드리다가 왔다.

아내는 안될 일을 왜 다시 시작하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이지만

나는 아내에게 KFC회장이 치킨 장사를 시작한 것이 예순이 넘어서였고

약 5천번의 실패 끝에 첫 매장을 오픈할 수 있었고 그것을 출발점으로 세계 최대의

치킨 프렌차이즈 업체 회장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주며 조용히 장인을 응원하자고

타일렀다.

 

재미로, 혹은 호기심으로 번지점프를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세상에 지기 싫어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또는 가족을 지키겠다는 절박하고도 비장한 각오로 그 높은 64미터 공포의 발판을

박차고 밑으로 뛰어내리는 용감한 '도전자'들이 있다.

그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