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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쾌함과 진지함의 조화

오션지 2009. 7. 9. 17:02
어젠 하루 종일 옥션엔 접근도 못했고
농협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저녁 늦게 되어서야 겨우 은행 입출금 확인을 할 수 있게 된것이다.
이제는 손가락 몇 번만 까딱거리면 내역 확인이나 입출금이 가능한
시대에 살다보니 펜으로 뭘 쓴다는게 영 불편한 느낌이 든다.
그러고보니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본지도 참 오래되었다.
예전엔 친한 친구에게도 편지를 자주하고 심지어는 친구 녀석들 연애편지도
써준 시절도 있다.
그러나 시대유감이라 했던가.
남들이 다 관둔 편지쓰기를 해봐야 내 정성을 알아줄 이 몇이나 될까...

아마 동네에서 우리집만큼 우편 배달부가 자주 오는 집도 드물것이다.
오늘 아침에는 늘 오는 복지시설 안내장이 우편배달부의 손을 통해
우리집에 왔다.
그런데 그 우편 배달부가 오늘은 별르고 별렀는지 결국 한마디했다.
'주소지가 잘못 되었으니 여기 살지 않는분은 정리좀 해주세요'
여지껏 아내에게 전달되던 까닭에 나는 잘 몰라
그냥 받아만 두었는데 아마 그 우편물 중에
처제들 젊은 시절 명단이 들어가 있었는지 살펴보니
정말 시집 다간 처제들 안내장도 우리집으로 오고 있는 것이었다.

듣고 나니 민망도 하고 또 마음도 불편하고 해서
정리를 하느라 이것 저것 처리를 하는데 오전이 다 갔다.
우편배달부들도 실은 요즘같은 시기에 배달 양이 많이지면
그만큼 귀찮기 마련일터.

온라인 영수증도 많고 문자 메시지도 많은데
왜 종이로 된 안내장이 많아서 배달량만 많은가 한탄할만도 하다.
세상이 좋아지다보니 아들들하고도 왠만한 일은 문자로 주고받는다.
이제 책상 머리에 뭐라고 써놓으면 아예 거들떠도 보지 않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치워버린다.

막내 딸년이나 좀 감상적이라
간혹 아직도 그림이다 뭐다 해서 좀 그려대지
큰 놈들은 멋대라리 없이 문자질에 빠져있다.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의 작은 쪽지 하나가 불혹 넘긴 이 나이에도
가슴 한켠에 남아있는데 그건 참 고상하게도 느껴졌던
만년필로 쓴 잉크 자욱이 아주 고왔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유난히 만년필에 관심이 많이 간다.
어느날인가 만년필을 비싸게 주고 사왔더니 아내가 핀잔을 주는대도 불구하고
그 만년필로 뭘할까 고민하다가 (정말 요즘은 고민이 된다)
성경 필사를 해보자고 마음먹고 요즘 가끔씩 필사를 해나가고 있는데
역시 만년필이 주는 그 사각거리는 느낌은
햇살 좋은 오후 느즈막히 커피 한잔에 자개상까지 갖춘
일명 폼잡는 글쓰기 시간이면 그 가치가 유난히 더 좋게 느껴진다.

바이러스로 난리가 난 상태다보니 당연히 은행 업무니 뭐니 아무것도
볼 수가 없어서 난감한 까닭에 하는 수 없이 일일이 적어가며
이것 저것 정리를 하다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서
만년필 유감까지 길어진것이다.

열손가락을 다 사용하면서도 요즘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아름다운 감정이나 정성을 제대로 표현못해내는 짧은 감상의 시대가 되고 말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펜을 잡는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펜은 고작해야 세 손가락을 쓰면 누구나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열손가락에 비해 들어가는 정성은 결코 만만치 않다.
잘써야지 하는 마음씀씀이의 질은 키보드의 딸깍거리는 소리로
얻을 수 있는 청각적 요소의 결과물과는 참 다른 것이 아닌가.

애국가를 글로 쓰라는 것과 키보드로 입력하는 것을 내기한다면
아마도 키보드가 훨씬 빠를 것이 분명한 이 시대에
이틀 정도 컴퓨터로 하던 일이 안되어 다시 잡은 펜으로부터 받은
새롭기만한 영감들은 컸다.

성경을 쓰며, 숫자들을 쓰며, 그리고 이름들을 쓰면서
하나 하나가 주는 그 진지함이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긴 처음이다.
빠른 것이 주는 경쾌함에 견주어볼때
느림이 주는 진지함은 요즘 같은 때에 꼭 필요한 일이다.
나는 교회에서들 왜 성경을 쓰는 훈련들을 좀 더 시키지 않으면
안되는가에 고민을 던져본다.
아이들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내용 하나 하나를 손으로 직접 쓰며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진지함과 깊은 여운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색의 열매들을 맛보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는 교회가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지 한없이 기쁘기만 한 것이다.